조개껍데기로 한술…울릉도 풍미가 내 안으로
바닷가 사람들은 홍합을 담치 또는 섭이라 부른다. 나도 홍합보다는 담치가 입에 익어 있다. 시장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홍합은 양식으로 생산된 것이다. 그러나 맑은 바닷속 바위 벼랑에 붙어 있는 자연산 홍합은 양식보다 훨씬 굵고 맛도 뛰어나다. 10년생쯤 되면 크기가 주먹만 하고 영양분이 많아 보약보다 낫다.
울릉도 도동항 주변의 식당 골목에 들어서면 홍합밥을 명물 먹을거리로 선전하고 있다. 1인 분에 1만원을 호가하는 홍합밥은 맛도 그럴싸하여 울릉도의 풍미를 느끼기엔 안성맞춤인 음식이다. 그러나 나는 식당의 홍합밥을 사먹지 않는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원형의 맛을 다치거나 손상시킬까봐 쉽게 숟가락을 내밀 수가 없다.
##육지서 실려온 멀미쌀로 밥 지어야 제맛
그 해가 언제였나. 어딜 떠나지 못해 맘속에서 바람이 일고 있는데 울릉도에 살고 있는 한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들어왔다 가지." 전화 한 통이 불을 지른 것 같았다. 휴가원을 내고 짐을 꾸리고 나니 조바심이 더 심해졌다. 출발 전날은 잠이 제대로 오지 않았다.
"배낭은 뭐 하러 지고 왔어. 이번에는 맛있는 거나 먹고 그냥 놀다 가면 되지." 친구가 미리 대기시켜 놓은 발동선으로 옮겨 탔다. 그는 물질을 잘하는 섬 친구 둘을 소개하더니 서쪽으로 키를 돌려 바닷바람을 갈랐다. 배 안에는 양은솥 한 개와 화목 한 묶음 그리고 홍당무를 비롯한 양념류가 얹혀 있었다.
배가 삼선암을 지날 무렵 다이버들은 고기 상자를 바다에 던지더니 자신들도 풍덩 하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친구와 나는 해변에 도착하여 간이화덕을 만들고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친구는 "쌀도 육지에서 배를 타고 울릉도로 들어올 때 풍랑이 심하면 멀미를 한다"고 거짓말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담치밥을 지을 땐 멀미쌀로 해야 제격이야. 그게 진짜 울릉도 맛이거든." 그는 홍당무를 써는 내게 "너무 굵게 썰지 마" 하고선 배를 몰고 물속에서 작업 중인 친구들을 데려오려고 바다로 나갔다.
##홍당무'채소 밥 위에 올려 먹음직스럽게
다시 돌아온 고기 상자에는 홍합과 합자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가운데 전복과 해삼도 몇 마리 눈에 띄었다. 밥이 익기도 전에 소주잔을 들고 있는 내게 섬 친구들은 익숙하고 날랜 솜씨로 싱싱한 생선회를 만들어 주었다. 그러고는 홍합 등을 잘게 난도질하여 김이 오르고 있는 멀미밥에 부어 난생 처음 먹어보는 홍합밥을 지었다. 솥에 뜸이 돌자 갖은 양념장을 밥 위에 뿌려 간을 맞춘 후 찌그러진 양재기에 고봉으로 밥을 퍼주었다.
"숟가락이나 하나 줘." "홍합밥은 조개껍데기로 먹어야 제맛이야." 친구가 던져준 가장 큰 조개껍데기로 홍합밥을 먹어보니 별로 씹지도 않았는데 목구멍으로 바로 넘어갔다. 홍합밥은 반찬이 필요 없었다. 쫑쫑 썬 붉은 홍당무와 푸른 채소가 밥 위에 적절하게 어울려 있어 입만 신나는 게 아니라 눈까지 덤으로 즐거웠다.
솥 밑에 눌어붙은 누룽지까지 긁어 먹고 해변에 누우니 따가운 햇살과 함께 울릉도 전체가 내 품에 살풋이 안기는 것 같았다. 나는 그날 삼선암 근처 해변에서 홍합밥을 먹어본 이래 숱한 세월이 지났어도 그렇게 맛있는 밥을 여태까지 먹어 본 적이 없다. 요즘은 동해의 항구마다 홍합밥이 널려 있지만 아무래도 기억 속의 그 맛에 미치지 못할 것 같아 한 그릇 먹어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홍합 우려낸 물에 데친 청각 넣으면 냉국
그러다가 연전에 몇몇 다이버들과 남해 사량도에 들렀다가 울릉도 홍합밥만치나 맛있는 밥을 우리 손으로 끓여 먹은 적이 있다. 그날 옥동회집(주인 강기대 010-5568-7328)에 짐을 풀고 생선회는 그 집 것을 주문했지만 홍합밥은 우리가 짓기로 했다. 마침 주인아저씨가 채취해 온 청각으로 냉채를 만들었는데 그것 또한 영원히 잊지 못할 별미 중의 별미였다.
홍합을 우려낸 물에 소금간을 하고 살짝 데친 청각을 썰어 넣었더니 근사한 청각 냉국이 되었다. 물론 마늘과 풋고추를 잘게 썰고 깨소금과 후추를 친 후 참기름 한 방울 떨어뜨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여름 휴가철. 바로 이때가 홍합밥과 청각 냉국을 맛볼 최적기다.
수필가 9hwal@hanmail.net
댓글 많은 뉴스
"이재명 다시 보이네 와"…참사 후 커뮤니티 도배된 글 논란
"헌법재판관, 왜 상의도 없이" 국무회의 반발에…눈시울 붉힌 최상목
전광훈, 무안공항 참사에 "하나님이 사탄에게 허락한 것" 발언
음모설·가짜뉴스, 野 '펌프질'…朴·尹 탄핵 공통·차이점은?
임영웅 "고심 끝 콘서트 진행"…김장훈·이승철·조용필, 공연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