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랑 산사람] 공주 계룡산

입력 2010-07-29 09:08:31

계곡 따라 짙푸른 녹음…가슴 속까지 '개운'

무속인, 도인들의 수련 필수코스, 고교시절 국어책에서 본 '갑사로 가는 길'의 공간적 배경. 계룡산의 아이콘은 이 두 가지로 요약될 듯싶다. 전자는 계룡산을 기인이사(奇人異士)들이 횡행하는 신비의 공간으로 만들었고, 승속을 뛰어넘는 대사와 처녀의 사랑은 지고(至高)의 필리아(우정, 자매애)의 전형으로 남아 있다. 백두대간에서도 비켜서 있고 큰 산맥을 이루지도 못한 충청 내륙의 조그만 산이 인기명산 11위에 랭크되고 연간 200만 명의 관광객을 불러 모으는 것은 두 상징의 후광이 크다고 하겠다.

계룡산은 천황봉에서 쌀개봉-삼불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닭볏을 한 용의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해서 생긴 이름. 일찍이 개국 터 답사에 나섰던 무학 대사가 산세를 보고 금계포란(金鷄抱卵), 비룡승천(飛龍昇天)형이라고 말한 데서 유래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도인들의 단골 메뉴, 계룡산 수도 경력

숱한 술사들의 이력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계룡산 수도 경력'은 이미 이 산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무속인들은 계룡산은 산세가 좋고 혈맥이 왕성해 산신(山神)으로부터 영력을 받는 데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비운의 영웅이 좌절한 터에서 '기도발'이 잘 받는다고 하는데 조선 개국 초 도읍지로 거론되다 소박을 맞은 분노와 수치가 땅에 서려 이런 기운이 무속인들과 잘 감응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한때 골마다 당집이요, 계곡마다 점집이었을 정도로 유사종교들의 근거지를 이루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 당시 상당수가 정리되었다.

원래 계룡산 산행은 '춘마곡 추갑사'(春麻谷 秋甲寺, 봄에는 마곡사 가을엔 갑사)였으나 동학사 진입로에 10리 벚꽃터널이 생겨나면서 '춘동학'(春東鶴)에 이름을 넘겨주고 말았다. 대전에서 진입이 빠르고 고속도로 접근이 쉬운 교통의 편의성도 이런 변화에 일조하였다.

봄가을 경치를 다투는 틈새에 사각지대가 있으니 바로 동학사 신록산행이다. 은선폭포를 끼고 시원한 계곡을 타고 오르는 동학사 계곡산행은 '계룡산 8경'에 들 정도로 유명하다. 봄가을처럼 컬러풀한 색의 향연은 없지만 가슴 속 먼지까지 탈색시켜 버릴 듯한 짙푸른 녹음에 한나절 몸을 맡겨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등산로는 동학사-남매탑-삼불봉-관음봉-동학사로 돌아오는 코스로 잡았다. 탐방센터 입구에서 바로 오른쪽 작은 길을 찾아 오르면 남매탑-삼불봉으로 오르는 길과 연결된다.

#'좋은 기운 받자' 외지서 합방하러 오기도

등산로 입구에서 취재팀을 맞는 건 줄을 지어 서 있는 모텔들. 은밀한 곳을 찾다 보니 산 아래까지 반경을 넓혀온 것 같다. 좋은 기운을 받기 위해 외지에서 일부러 합방하러 오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등산은 천연 비아그라라더니 그 말이 맞긴 맞구먼. 산에서 받은 정기를 집안 침실로 가져갈 것이지 이런 데서 쏟아 버리면 워쩐댜~." 앞서가는 다른 일행의 농담에 대소(大笑)하며 천장골로 오른다. 입구에서 남매탑까지는 2.4㎞. 1시간 남짓이면 충분한 거리다.

장마를 살짝 비켜선 계곡, 습도는 최고조다. 무더위와 습도, 등산객들에게는 핸디캡이지만 동물들에겐 기회일 수 있다. 이런 날씨 속에서 곤충들은 마음껏 종족 번식 행위를 한다. 이 때문에 숲은 제짝을 찾는 각색의 신호음들로 웅장한 화음을 이루었다. 이 장엄한 오케스트라는 6부 능선쯤 이르자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바다에서 수심에 따라 어종이 나뉘듯 산에서도 고도에 따라 생태가 달라지는 것이리라.

1시간쯤 걸어 큰배재에 이르렀다. 상원암 쪽으로 진행한다. 잠시 후 녹음 사이로 두 개의 탑신이 반갑게 일행을 맞는다. 계룡산의 상징 중 하나인 남매탑이다. 사실 계룡산을 찾는 산꾼들 중 상당수는 학창시절 교과서에서 접한 대사와 처녀의 애틋한 서정에 끌려서 온 사람들이다. '색을 이겨낸 도행의 기념탑'으로 상징되는 이 탑은 수도와 색욕의 간극에서 고뇌하다 도를 이룬 남녀의 애틋한 전설이 서려 있는 곳이다. 7층탑은 오라비탑, 5층탑은 누이탑으로 모두 충남도 지정 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

지금은 신록과 원색의 등산복이 물결을 이뤄 선(禪)적인 분위기는 찾기 힘들지만 달에 반쯤 걸린 탑이 가을밤에 기울 때면 누구든지 시적(詩的) 고요에 빠져들게 된다. 한 가지 의문도 든다. 둘의 로맨스는 그렇다 치고 호랑이에게 신부를 빼앗긴 신랑의 억울함은 어디서 보상 받나.

#삼불봉-관음봉 자연성릉 경관 으뜸

상원암에서 식수를 충분히 채우고 일행은 삼불봉으로 오른다. 삼불봉은 계룡산의 기와 혈이 모이는 풍수상의 주봉으로 알려져 있다. 삼불봉은 계룡산 산행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자연성릉(自然城陵)의 출발점. 자연성릉은 삼불봉에서 관음봉까지 이르는 오리(五里)길 능선을 말한다. 이 등산로는 수직절벽을 따라 위태롭게 나있는 최고의 험로. 가끔씩 '노약자 우회' 표지판이 튀어나와 산꾼들을 긴장시킨다. 중간중간 난간에 기대 숨을 돌리면 자연성곽의 거친 암릉을 감상할 수 있다.

거의 수직으로 뻗은 철 계단으로 올라 일행은 관음봉으로 향한다. 관음봉은 군사시설로 막혀버린 천황봉을 대신해 실제적인 주봉 역할을 하고 있다. 전망대에 오르면 문필봉, 연천봉부터 천황봉, 쌀개능선과 동학사 쪽으로 뻗어간 능선까지 한 흐름에 읽을 수 있다.

시간이 지체된 탓에 일행은 연천봉 등정을 포기하고 동학사 계곡으로 하산길을 잡는다, 내리막길 중간에 들르는 은선(隱仙)폭포. 높이 46m에서 내리꽂는 물줄기가 더없이 시원하다. 폭포 물줄기가 낙차하며 피어나는 운무는 계룡7경 중 하나로 꼽힌다. 과연 이름대로 '신선이 숨을' 만한 비경이다. 폭포 위로는 유명한 쌀개봉이 멋진 배경 그림으로 자리 잡았다.

하산길 동학사 신록은 여전히 푸르다. 비구니의 도량인 동학사엔 앳된 얼굴의 비구니들이 각자의 일상에 따라 바삐 움직인다. 저들의 단아한 매무새에서 남매탑 전설이 오버랩된다. 방금 지나친 여승의 굵은 뿔테안경 너머에서 미처 털어내지 못한 세상의 흔적을 느꼈다면 그것은 순전히 나의 속물근성 탓이다.

글'사진 한상갑기자 arira6@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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