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모습 보여줄지 스스로 기대돼요
서울 삼청동은 도심 속 휴양림 같은 곳이다. 이곳에서는 사람들의 빠른 발걸음이 한 박자 느려지기도 하고, 마음가짐 또한 치열함을 떠나 느긋해진다. 최근 삼청동을 찾는 사람이 늘어 이런 '느림의 미학'이 많이 퇴색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서울 안에서 이만큼 마음이 편안해지는 곳을 찾기란 쉽지 않다.
영화 '이끼'의 배우 유선을 삼청동에서 만났다. 가장 바쁜 직업군 중 하나인 연기를 업으로 삼고 있는 배우를 시간이 느려지게 만드는 삼청동에서 만난다는 것, 느려진 시간의 힘을 빌려 사람의 향기를 좀 더 느낄 수 있겠다는 설렘이 앞섰다.
#시원한 웃음'솔직한 모습에 머릿속 '개운'
유선과의 인터뷰는 태양이 가장 강하게 내리쬔다는 오후 2시에 시작됐다. 직장인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시간 중 하나인 오후 2시. 하긴 요새는 2PM이란 아이돌그룹 탓에 오후 2시에 대한 불편함(?)이 좀 사라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오랫동안 시계 태엽에 맞춰지다시피 한 신체리듬은 어쩔 수 없다. 약간의 공황상태가 어김없이 찾아오는 찰나 유선의 시원한 웃음에서, 반가운 인사에서, 그리고 솔직한 모습에서 언제 그랬냐는 듯 머릿속이 개운해졌다.
유선은 지난 해 방영된 KBS 2TV 주말극 '솔약국집 아들들'에서 데뷔 이후 가장 복슬복슬(?)한 이미지로 변신했다. 그래서일까. 당시 맡았던 인물의 이름도 '복실이'였다. 많은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았던 복실이는 약간 바보 같기도 하지만 요즘 보기 힘들게 순수하고 푸근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기존 그녀가 가졌던 이지적이고 강할 것 같은 느낌과는 사뭇 달랐다.
#귀 얇고 털털…딱 부러지는 분위기와 정반대
"평소 저는 꾸미는 것을 별로 안 좋아하는 털털한 사람이에요. 성격은 솔직한 편이고요. 복실이란 캐릭터가 많은 사랑을 받아 참 기분 좋았는데요. 사실 복실이가 순수하고 맑고 깨끗하지만 말 못한 사연이 많아 겉과 속이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인물이잖아요. 그래서 더 매력이 있었던 것 같아요. 저도 복실이처럼 쉽게 상처받고, 별 것도 아닌데 마음고생으로 속앓이하고 그러거든요. 정말 아는 사람은 다 아는데 저 참 여려요. 게다가 귀도 얇아 잘 속고요.(웃음)"
잠시 기자의 귀를 의심했다. 무엇이든 딱 부러질 것 같던 유선이 '귀가 얇다. 털털하다'라는 말을 술술 털어놨기 때문이다. 복싱에서 예상치 못한 카운터 펀치를 맞을 때 더욱 충격이 크듯, 머릿속에 그려두었던 이미지가 순식간에 다른 것으로 바뀌는 데 대한 놀라움은 누구든 느껴봤을 테니 장황설은 여기서 끝. 어쨌든 이 같은 상상은 기자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다. 많은 이들이 유선에 대한 이미지를 그렇게 가지고 있다는 것을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한 터였다.
영화 글러브 캐스팅…통통 튀는 이미지 도전
"그러게요. 많은 분들이 저의 흐트러진 모습을 상상하지 못하시더라고요. 코미디나 멜로 같은 장르를 하고 싶었고, 또 성사가 될 뻔도 했는데 막상 '유선 씨와 그 역할이 상상이 안 간다'며 본의 아니게 못한 경우가 더러 있어요. 정말 한 분, 한 분 뵙고 설명할 수도 없고 해서 누군가 저를 뽑아줄 사람 만날 기회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바로 '이끼'의 강우석 감독님이 저를 처음 봐주신 것 같아요. 그래서 '이끼' 마치고 바로 '글러브'란 영화에 캐스팅 됐고요. 저로서는 아마 이 작품이 가장 새로운 도전이 될 것 같아요. 통통 튀는 밝은 이미지거든요."
그녀는 자신의 원래 모습을 살려 연기할 수 있다는 것에, 또 지금까지와 다른 이미지를 관객들에게 보일 수 있다는 것에 굉장히 설레고 있었다. 그런 면에서 최근 개봉한 '이끼'에서 연기한 이영지란 인물 역시 유선에게서 또 다른 모습을 찾게 해준 캐릭터다. 수줍은 듯하면서 과감하고, 때로는 비밀스러운, 그야말로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인물이다. 특히 이 영화의 가장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의 의미심장한 웃음은 '이끼'의 빼놓을 수 없는 명장면 중 하나로 손꼽힐 만큼 그녀의 연기는 기억 속에 오래 남았다.
#이끼 출연 확정 후 '감격'
"'이끼'의 이영지란 인물을 두고 저 말고 여러 신인배우들이 오디션을 본 상태였어요. 이미 추려놓은 명단까지 있다고 들었는데, 마지막에 제작부에서 '기성 배우들도 한 번 고려해보자'고 해서 제게도 기회가 온 거죠. 물론 저도 너무 하고 싶었던 작품이었어요. 무엇보다 강우석 감독님에 정재영 씨가 출연한다고 하기에 마구 호기심이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작품에 대한 고민을 깊게 했죠. 극중 많은 비중은 아니지만 남자들만의 세상에서 나름 존재의 힘을 가진 인물이고, 후반부에 강력한 임팩트를 주는 존재라는 점에서 미스터리 기운도 느껴지잖아요. 여러 면에서 열정적으로 달려들 수 있었죠. 캐스팅이 확정되고 나서 정말 감격했어요."
#강우석 감독 '차세대 스크린 책임질 여배우'
영화 '이끼'에는 다양한 캐릭터가 살아 숨쉰다. 이는 강우석 감독 특유의 연출 스타일이기도 하지만 극의 비중과 상관없이 인물들의 개성이 돋보이는 데는 배우들의 호연도 한몫했다. 물론 여기에 유선의 연기도 보태졌다. 강우석 감독은 촬영 전 유선을 보고 "눈빛에 사연이 많이 담겨 있는 느낌이다. 딱 영지다"라고 했고, 촬영을 마친 후에는 "차세대 한국 스크린을 책임질 여배우"라고 극찬했다. '충무로의 미다스 손'인 강 감독의 칭찬은 그녀에게 어떤 느낌이었을까.
"직접 듣지는 못하고, 기사로 나온 걸 봤어요. 보자마자 식은땀이 쭉 나던데요. 얼굴이 확 달아올랐어요. 자기 작품에 나온 배우를 이렇게 좋은 말씀으로 공개적으로 칭찬해 주시는데 '내가 과연 그만큼 연기했나? 그만큼 관객에게 평가받을 수 있을까?'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결국 강 감독님께 내가 조금 신뢰를 얻었구나 정도로 생각했는데, 어쨌든 갑자기 엄청난 책임감을 짊어지게 되는 느낌이었어요. 감사하지만 더 정신 차리고 열심히 해야겠다란 각오를 다지게 됐습니다."
#지금이 내 인생에서 가장 설레는 때
유선은 '이끼' 팀을 만나면서 시나브로 한 단계 올라선 배우가 됐다. '아직 멀었다'는 그녀의 겸손은 그녀 특유의 호소력 짙은 목소리에 자신감을 실어줬다. 이에 더욱 그녀의 '다음'이 기대됐다. 현재 강우석 감독의 차기작 '글러브'에서 정재영과 함께 연기에 들어간 유선의 차기 행보는 어떨까.
"제 연기의 길은 멀고도 멀겠죠. 다만 여태까지 제 삶에 있어 지금이 가장 설레는 때 같아요. 앞으로 어떤 모습을 보일지 모르겠지만 제 스스로가 더 기대가 되고요. 그래서 '글러브'에 대한 심리적 부담이 크네요. 정말 잘하고 싶거든요. 제 궁극적인 목표는 보다 많은 선택의 폭을 가지고 작품을 여유있게 하고 싶다는 거예요. 좀 더 쌓아서 기대가 높은 그런 배우가 되고 싶어요. 또 나중에 제가 결혼해서 엄마가 됐을 때, 제 아이가 엄마가 배우라는 것에 자랑스러워할 수 있는 그런 모습을 남기고 싶어요. 근사한 엄마, 또 근사한 사람 유선으로 말이죠."
(매일경제 스타투데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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