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 수·봉급 절반 감축, 한 해 예산 3분의 1을 부채상환에
도시가 파산하면 어떻게 될까.
3년 전 파산한 일본 홋카이도의 유바리(夕張) 시민들은 참혹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회사가 망한 것과 비슷해 그 구성원들의 고통은 컸다. 시민들의 세 부담이 늘고 복지 혜택은 사라졌다. '2등 국민'이나 다름없었다. 성남시가 며칠 전 모라토리엄(채무지급유예) 선언을 했다기에 남의 일이 아닌 것 같아 꼼꼼하게 살펴봤다.
■생기를 잃은 도시
작은 시골 도시라지만 볼거리가 있었다. 시내 중심가는 1970, 80년대 한국 영화관을 재현해 놓은 듯 대형 영화 간판들로 뒤덮여 있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애수' '석양의 7인' 같은 눈에 익은 고전 영화였다. 가까이서 살펴보니 오래돼 빛바랜 간판이 많았고 일부는 군데군데 색칠이 벗겨져 있었다. 시청에서 '유바리 국제판타스틱영화제'를 홍보하기 위해 붙여놓은 것이지만 재정 파탄으로 더 이상 관리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직까지는 그런대로 봐줄 만하지만 얼마 후에는 도시의 흉물로 전락할 것이 분명해 보였다.
대낮인데도 시내 중심가는 한적했다. 예전 의원과 상점으로 쓰던 건물에는 셔터가 내려져 있었고 시민들의 모습도 거의 볼 수 없었다. 술집, 편의점도 없었고 1, 2분에 한 대씩 오가는 차량이 전부였다. 어둠이 깔리자 더욱 처참해졌다. 지역 특산물인 멜론을 판매하는 조합 직영 상점 한 개를 제외하고는 불을 켜놓은 곳이 없었다. 가로등 불빛만 반짝이는 '유령 같은' 거리로 변한 것이다.
한때 북적거리던 도시는 인구(1만1천여 명)가 크게 줄면서 완전히 생기를 잃어버렸다. JR역사 앞에서 만난 식당 주인 가즈마다 가즈요(數馬田和代·74)씨는 "파산의 고통은 서서히 이겨가고 있지만, 젊은 사람들이 모두 떠나버려 너무 슬프고 힘들다"고 했다. 재정파탄 이후 2천100명이 이주하는 바람에 65세 이상 노인 인구 비율이 44.4%로 전국에서 제일 높아졌다.
■채무지옥이 된 사연은?
역시 지방자치 단체장의 방만한 투자가 원인이었다. 이곳은 문경, 태백과 마찬가지로 유명한 석탄산지였다. 1970년대 초반 인구가 11만 명이나 됐지만 모두 폐광되면서 1990년 2만 명으로 급감했다. 24년간 재임한 나카다 시장은 자구책으로 '탄광도시를 관광도시로'라는 기치를 내걸고 호텔, 스키장 같은 대규모 리조트, 테마파크를 잇따라 건설했다. 모두 돈을 빌려 벌인 무리한 사업이었다.
한때 200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몰려왔으나 갈수록 그 수가 줄면서 리조트와 테마파크는 적자를 내기 시작했다. 시는 적자를 감추기 위해 분식회계를 하고 차입금을 끌어다 쓰다 결국 재정파탄을 맞았다. 빚이 무려 600억엔(8천200억원)이나 됐는데 시청 1년 예산 45억엔의 10배가 넘었다. 2007년 3월 유바리는 법에 따라 '재정재건단체'(현재는 재정재생단체)가 돼 중앙정부의 관리 체제에 놓여있다. 사실상 자치단체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것이다.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다. 정부가 처분한 353억엔(4천830억원)을 18년에 걸쳐 갚아야 한다. 매년 15억엔(205억원)씩 갚으려면 시민들에게 세금을 더 내게 하고 복지 서비스를 줄일 수밖에 없다. 시민들의 부담이 큰데도 부채 상환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2007년, 2008년에는 14억엔씩 갚았지만 지난해에는 4억엔밖에 갚지 못했다. 마카미나토 야스히로(中港康裕·43) 유바리시 지역재생추진실 총괄주간은 "시는 뼈를 깎는 노력으로 매년 8억, 9억엔의 수익을 내고 있다"며 "남은 322억엔은 계획대로 갚아 나갈 것"이라고 했다. 시 공무원(269명→166명)을 절반 가까이 줄이고 민간 임대 사업을 늘리면서 돈을 모으고 있지만 인구 감소와 고령화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듯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파산을 책임지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문제를 일으킨 전임 시장은 이미 사망했고 현 시장은 재정 파탄과 무관하다. 책임 소재 논란에도 불구하고 그냥 넘어간 것을 보면 어찌 보면 한국 상황과 비슷해 보인다.
■재기의 몸부림
2007년 일본 최초의 파산이었던 만큼 일본 각지에서 온정이 쏟아졌다. 일부 기업은 유바리에 공장을 옮겨왔고, 쓸모가 없는데도 시 소유 건물을 임대함으로써 시 재정에 보탬을 줬다. 지역 특산물인 멜론도 잘 팔렸다. 언론에 대서특필되면서 파산 도시의 실체를 보려는 '파산 투어'도 인기를 끌었다. 이제는 그것마저 시들해졌고 홀로 자구책을 찾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유바리시는 기존 시설을 적극 활용하고 자연친화적인 관광 상품을 개발하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새로운 투자를 할 여력은 없지만 거대한 리조트 시설과 테마파크를 그냥 놀릴 수 없기 때문이다.
시바키 세이지(芝木誠二·44) 지역재생팀 총괄주간은 "이제 유바리를 더 부유한 마을로 만들기는 불가능해졌다"면서 "장기적인 관점에서 시민들이 편안하고 잘살 수 있는 마을을 만드는 데 노력하겠다"고 했다.
유바리에서 만난 관계자들은 한결같이 지자체의 대규모 관광산업 투자는 안 된다며 손을 내저었다. 이들은 "관광객 유치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주민들의 생활 안정이었는데 그걸 몰랐다"고 했다. 참담한 실패를 겪고난 후에야 지자체의 기본 책무를 절감하게 됐다는 것이다. 일본에서도 실패한 리조트, 테마파크, 골프장 사업에 올인하는 한국의 지방 도시들에게 교훈이 될 만한 충고였다.
유바리에서 삿포로로 돌아오는 기차를 타고 보니 승객은 취재팀 2명뿐이었다. 활력 잃은 도시를 찾아오는 사람이 그만큼 없는 것이다. 텅 빈 기차 안에서 유바리 시민들은 묵묵히 그 고통을 견디고 있지만, 한국인들은 그런 상황이 오면 과연 어떻게 행동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 지자체들의 재정 상황을 보면 유바리의 악몽이 재현되는 곳이 숱하게 생겨날 것이기에 더욱 궁금해진다.
홋카이도 유바리에서 박병선기자 lala@msnet.co.kr 사진·이채근 기자 mincho@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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