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픈 프라이스제 확대시행 일주일…곳곳서 부작용
"오픈 프라이스제, 그게 뭐예요?"
지난 1일부터 오픈 프라이스제가 확대 시행됐다. 권장소비자가격을 비싸게 책정한 뒤 다시 할인해 파는 '엉터리 세일'을 막고, 합리적인 가격을 정착시키겠다는 의도에서다. 하지만 일주일이 지나도록 아직 소비자의 실생활에는 별다른 변화를 가져오지 못하고 있다. 대형마트들은 이미 판매가격 중심의 가격표시제를 시행중이었고, 중소 판매점에서는 아예 제도 시행 자체를 모르는 경우가 많은 것. 소비자들조차 관심 밖이어서 오픈프라이스제는 시행 초기부터 겉돌고 있다.
◆판매가격을 몰라(?)
7일 기자가 찾은 북구의 한 아파트 상가 슈퍼마켓에는 '아이스크림 50% 할인'이라는 문구가 버젓이 걸려 있었다. 이 할인율은 권장소비자가격에 비해 50% 할인된 가격에 판매하고 있다는 의미. 오픈 프라이스제가 실시되면서 권장소비자가격이라는 것이 없어졌기 때문에 사실 이 50% 할인이라는 것은 적합한 문구가 아니다. 굳이 할인율을 표시하려면 기존 판매가를 바탕으로 다시 추가 할인율을 표시해야 한다. 하지만 이 사실조차 알지 못하는 가게 주인은 기자의 물음에 "도대체 뭐가 잘못됐다는 건지 모르겠다"며 "오픈 프라이스 제도가 뭐냐"고 되물었다.
20년 넘게 동네에서 슈퍼마켓을 운영해 온 김모(69) 씨는 요즘 과자 봉지에 가격표가 사라지면서 물건을 파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역시 오픈 프라이스제도의 시행조차 알지 못하는 김 씨는 "새롭게 들여오는 물건들은 왠지 모르겠지만 가격표가 사라져 있어 가격을 외워야 하는데 종류가 하나 둘도 아니고 기억력이 떨어져 좀체 외워지질 않는다"며 "벌이는 시원찮지만 소일거리라도 하려고 구멍가게를 차려놓고 있었는데 이제 이 장사도 접어야 할 때가 됐나보다"고 한숨을 쉬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일부 업체에서는 편법도 등장하고 있다. '권장소비자가격 ○원'이라는 표시가 사라진 대신 과자 봉지나 케이스에 깨알처럼 작은 글씨로 'L-20', '2.2K' 등 암호를 방불케하는 표기를 해 놓은 것. '20'은 2천원을 의미하는 것이고, '2.2'는 2천200원이라는 가격을 뜻한다.
◆동네마트, 소비자만 고전
대형마트들은 제도 시행과 상관없이 이미 판매가 표시제를 시행중이었다. '30% 할인'이라고 쓰여진 가격표 옆에는 3천980원이라는 가격에 줄을 긋고 좀 더 큰 글씨로 2천780원이라고 표기돼 있었다. 이전에는 동일 매장에서 3천980원에 팔았던 것을 30% 할인해 판매한다는 의미다. 홈플러스 관계자는 "대부분의 대형 마트들은 '20일 이전 판매가 대비' 기준으로 할인폭 표시를 시행중이었기 때문에 별반 변화가 없다"고 밝혔다.
대신 고전을 면치 못하는 것은 동네 슈퍼마켓과 같은 중소형 유통업자들이다. 지금까지는 제품 포장지 겉면에 표시된 권장소비자 가격에서 일부 할인율을 적용하면 됐지만 앞으로는 가게 주인이 직접 판매가격을 매겨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이달 1일을 기점으로 일부 아이스크림과 과자류의 기습 가격인상까지 겹치면서 소매상인들은 마진율을 어느 정도로 정해야 할지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다. 마진을 포기하자니 남는 것이 없고, 그렇다고 높은 마진을 붙이자니 가뜩이나 대형마트와의 경쟁에서 밀리고 있는 처지에 또 다시 손님을 빼앗길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슈퍼마켓을 운영하고 있는 이모(46) 씨는 "대량으로 물건을 들여놓는 대형마트가 낮은 납품가를 바탕으로 가격 경쟁을 하는 것은 어쩔수 없는 일이겠지만 앞으로는 주변 슈퍼마켓들과도 10원 가격 경쟁을 벌여야 하니 가슴이 답답해진다"고 하소연했다.
소비자를 위한 제도라고는 하지만 정작 시민들은 불편을 호소하고 있다. 박진숙(36) 씨는 "권장소비자가격이 없으니 어느 가게에서 비싸게 파는지를 확인할 기준이 없어졌다"며 "여러 곳을 돌아다녀봐야 비로소 싼 곳을 검증할 수 있으니 예전보다 더 많은 발품을 팔아야 하는 불편이 생겼다"고 했다.
◆의류 확대시행, 문제없어
이번에 확대된 오픈 프라이스 대상품목은 가공식품만이 아니다. 정부는 1일부터 라면, 과자, 빙과류 등을 비롯해 의류 243종 등 모두 247종에 대해 권장(희망)소비자가격 표시를 금지했다.
의류는 1999년부터 신사정장과 숙녀정장, 아동복, 운동복 등 4개 품목에 대해 오픈 프라이스제가 시행되고 있었지만 이번 확대 시행을 통해 일반 옷에서 양말, 모자, 잠옷에 이르기까지 전품목에 대해 권장소비자가격 표시가 금지된 것.
하지만 권장소비자가격이 없어지더라도 패션업체에 미칠 파장은 크지 않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이미 오래전부터 상당수 품목에 대해 오픈 프라이스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데다, 가공식품과 달리 제조업체들이 가격 결정권을 쥐고 있는 만큼 매장별 가격 차별화가 이뤄지기 힘들기 때문이다.
대구백화점 관계자는 "옷에 붙어있는 가격표는 제조업체에서 제작된 것으로 백화점에서 가격을 새롭게 책정하지는 않는다"며 "제도가 모든 의류 제품으로 확대돼도 전혀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한윤조기자 cgdream@msnet.co.kr
※오픈 프라이스(Open Price)=제조업자가 판매가격을 정하는 기존의 권장소비자가격제와 달리 최종 판매업자가 실제 판매가격을 표시하는 가격제도. 가격을 표시하는 주체가 제조업자나 수입업자가 아니라 최종 판매업자가 되는 것이다. 1999년부터 시행됐으며 이달 1일부터 라면, 과자, 빙과류, 아이스크림류, 의류 243종 등 모두 247종에 대해 확대 적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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