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모임 옆자리에 앉은 은행 임원에게 이렇게 물었다. "국내 대형은행들의 연간 이익 규모가 조 단위를 넘나든다. 흑자 많이 냈다고 자랑하던데 그건 폭리를 취했다는 것 고백하는 것 아닌가?" 은행임원의 답변은 이랬다. "은행도 주식회사다. 이윤을 창출해야 한다. 외국인 주주들도 신경 쓸 수밖에 없다. 흑자 규모가 큰 것 같지만, 자산 규모를 감안하면 그리 많지 않다."
대출 부실로 공적자금을 수혈받은 은행들도 경기만 좋으면 몇 년 만에 입이 쩍 벌어질 만큼 큰 흑자를 낸다. 그런데 은행들 돈 버는 밑천을 보면 대부분 남의 돈이다. 고객 예금은 은행 입장에서 빚인 것이다. 더구나 은행은 예금 중 10%만 보유하고 나머지 90%를 굴릴 수 있는 법적 특권을 가졌다.
은행을 처음 시작한 이들은 영국의 금 세공업자였다. 당시 부자들은 금을 모아 세공업자에게 맡겼고, 금 세공업자는 이를 받은 증거로 '예탁증서'를 발행했다. 예탁증서는 금과 동일한 가치를 인정받아 유통됐다. 맡아놓은 금이 1천 온스라 해도 찾으러 오는 사람은 하루에 100온스도 안 된다는 점을 알고는 예탁증서를 몰래 마구 남발하는 세공업자들이 생겨났다. 금 세공업자들의 사기 행위, 이것이 은행의 시작이었다.
미국은 달러를 마음대로 찍어낼 수 있는 특권을 지닌 유일한 나라다. 만성적인 무역적자에 시달리는 미국은 파산하지 않기 위해 달러를 점점 더 많이 발행한다. 미국 정부가 발행하는 달러도 따져보면 빚이다. 미국 정부는 민간기구인 연방준비제도(연준)로부터 대출을 받아 달러를 유통시키고, 연준은 그 대가로 미국 재무부 채권을 챙긴다. 무역적자로 인해 미국을 빠져나간 달러는 마치 연어처럼 고향(미국)으로 되돌아간다. 세계 각국이 수출로 번 달러로 미국 국채를 앞다퉈 사들이는 탓이다. 이렇게 세계 각국이 쌓아놓은 외환 보유고는 미국 입장에서 볼 때 빚이다.
미국을 보면 영국 금 세공업자가 연상된다. 미국은 너무 많은 '예탁증서'(달러'국채)를 발행했다. 만일 '달러를 가져봤자 상품을 사지 못할 것'이라고 다른 나라들이 생각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상상하기 싫은 시나리오이지만 이는 미국 경제 파산 그리고 세계 경제의 파국적 국면으로 이어질 것이다.
이런 상황을 잘 알기에 어느 누구도 미국 달러의 가치가 하락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러나 미국의 통화 체제가 팽창 한계점으로 치닫고 있는 것 역시 불편한 진실이다. 지난 2003년 어느 학자는 앞으로 10년이 지나지 않아 미국이 연준과 다른 나라에 내다판 국채에 대한 이자를 감당할 수 없는 날이 올 것이라고 경고했다.
미국의 부채 상황이 궁금하면 http://www.usdebtclock.org에서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다. 미국의 총 부채는 6월 28일 현재 54조 2천억 달러. 우리 돈으로 6경 5천억 원이 넘는다. 이 가운데 정부 부채는 14조 3천억 달러이고, 개인 채무는 13조 1천억 달러에 달한다.
요즘 세계 경제의 가장 큰 뇌관은 국가 채무이다. 남유럽발 재정 위기가 예사롭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리스의 국가 채무는 지난해 국내총생산(GDP)의 115%에 달한다. 현재 미국은 이 비율이 92.5%이다. 이상한 것은 이 비율이 227.2%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일본의 국채가 안전자산으로 선호된다는 점이다. '닥터 둠'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루비니 뉴욕대 교수도 유로존이 더블딥에 빠질 가능성이 크고 이 여파가 세계로 확산될 것이라는 관측을 내놨다.
우리나라의 GDP 대비 국가 채무는 지난해 기준으로 33.8%로 아직은 양호한 편이다. 그러나 지난해 사상 처음으로 400조 원을 돌파한 데 이어 2, 3년 뒤엔 500조 원에 육박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그 증가 속도가 예사롭지 않다. 많은 전문가들이 우리나라 재정을 걱정하고 있다. 4대강 사업, 세종시, 지자체들의 중앙정부 예산 따내기 경쟁, 고령화, 통일 비용 등 국가 재정을 위협할 내적 변수들이 도처에 깔렸다. 앞으로 재정의 건전성 유지는 국운을 좌우할 최대 화두가 될 것이다. 재정의 효율적 배분을 최우선시하는 정책 기조를 당부한다.
김해용 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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