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흥의 책과 예술] 술꾼의 품격

입력 2010-06-30 07:17:41

매일처럼 술을 마시는 술꾼들 술의 역사·종류 정도는 알아야

▨『술꾼의 품격』/ 임범 지음/ 씨네21북스 펴냄/ 1만2천원

아버지는 술꾼이셨다. 부정과 부패로 얼룩진 1960년대 초 군무원으로 술에 절어 사셨던 당신에게 가족은 그저 벗어버려야 할 짐에 불과했었다. 해서 박정희 정권이 군부대의 비리척결을 내걸었을 때, 당신은 가족을 버리고 무작정 달아나고 말았다. 언제부터였을까? 아무런 이유 없이 버림받았다고 생각한 어머니에게 술은 결코 가까이해서는 안 될 혐오의 대상이었고 어린 세 남매에게도 그것은 우리의 가족을 불행하게 만든 원흉이었다. 더구나 독실한 기독교 집안인 외가에 얹혀 살아야 했던 아이들에겐 그야말로 술은 금단의 열매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절대적 빈곤에 시달렸던 1960, 70년대, 술은 늘 가난이라는 이름과 동격으로 취급되고 있었다. 사회적이든, 자신의 결핍이든 그것을 잊거나 극복하려는 변명 뒤에는 술이 가까이 있었다. 달동네 비탈진 선술집 어디에서나 고향을 등진 우리 아버지들의 신세한탄과 세월의 덧없음은 이어졌고 우리 어머니들의 한숨은 더 깊어만 갔다.

절대적 빈곤보다는 상대적 빈곤에 시달리는 오늘, 술꾼들은 어떻게 변했으며 그들의 품격은 어떤 것인가? 이런 질문들에 대한 속시원한 대답을 듣기 원한다면 어쩌면 『술꾼의 품격』은 얼핏 어울리지 않는 책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책장을 덮는 순간, 저자가 왜 책의 제목을 술꾼의 품격이라고 정했는지 어렴풋이 이해하게 된다. 저자가 고백한 것처럼 우리는 매일 술과 접하면서도 그 술이 가지는 의미는커녕 그 술의 종류나 역사마저 너무나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해서 저자는 우리 삶을 투영하고 있는 영화라는 보다 쉬운 장르를 통해 술이 가지는 역사와 종류, 그리고 그 의미를 조명하고 이에 한 걸음 더 나아가 술을 마시는 사람들의 품격을 슬쩍 행간에 집어넣는 것으로 지독한(?) 술꾼인 자신의 역할을 마무리한다.

싱글몰트 위스키와 블렌디드 위스키, 라거 맥주와 에일 맥주가 다른 점, 어느 새 우리 사회 술문화의 화두가 되어버린 폭탄주의 기원, 양주 수입이 자유화되기 전까지 술집 진열대를 가득 메웠던 기타 제재주들(캡틴큐, 나폴레온)의 운명, 잭 다니엘스, 조니 워커, 바카디와 같은 귀에 익은 브랜드의 실제 주인들의 시대적 운명과 007 영화 속에 등장한 마티니라는 칵테일의 제조 방법의 변화, 럼의 대표 상표인 바카디가 쿠바에 들어선 카스트로 정부와 고향에서 어떻게 전쟁을 벌여왔는가에 대한 소개는 비록 단 한 잔의 술도 마시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재미있는 읽을거리를 제공한다.

영화 '여인의 향기'에서 알 파치노는 위스키 '잭 다니엘스'(Jack Daniel's)를 끼고 산다. '잭 다니엘스는 미국다움의 상징이다. 흔히 버번 위스키로 알려진 이 술이 단풍나무 숯을 통과시키는 여과 과정을 거친, 증류 과정이 다른 '테네시 위스키'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풍부한 안주거리를 만드는 『술꾼의 품격』은 진정 우리 시대의 술꾼들이 지녀야 할 품격의 가치를 논한다.

늘 약초를 술에 담가 드시던 할머니에게 과연 술은 금단의 열매였을까? 운명의 순간에 이르러 어머니에게 용서를 빌었던 실향민인 아버지에게 술은 또 어떤 의미였을까? 평생을 눈물로 사셨던 어머니는 아버지의 그 술탓을 용서했을까?

(여행작가·㈜미래티엔씨 대표)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