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상자는 자폭하라" 북한군 잔인했던 퇴각용 명령

입력 2010-06-25 07:17:54

9월 20일을 전후해 적군의 각급 지휘군관들은 8월 대공세와 9월 대공세에서 잇따라 패전의 쓴잔을 마시고 퇴각하면서 움직일 수 없는 중상자들은 물론 가까스로 몸을 추스를 수 있는 부상자들까지 퇴각에 방해가 된다며 수류탄 한 발씩을 나눠 주고 자폭하도록 종용하기도 했다. 최후의 발악이었다.

수많은 부상병들이 이 같은 상부의 비인간적인 만행을 규탄하며 함께 가기를 애원했으나 그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기 바빴다. 심지어 부상병들을 후송시켜주겠노라고 속이고는 모두 동굴 속에 가둬 놓은 뒤 수류탄을 터뜨려 참혹한 죽음으로 몰아넣기도 했다. 인간이 인간이기를 거부하는 끔찍한 만행이 아닐 수 없다. 한·미 연합군은 일주일 동안의 혈전에서 다부동 전선에서만 적 사살 1만1천142명, 포로 1천98명의 전과를 올렸다.

9월 21일 오후 미 공군의 융탄폭격이 휩쓸고 간 구미 금오산 기슭은 아비규환의 생지옥이었다. 인근 야전구호처(야전병원)의 책임의무군관(병원장) 장지혁 소좌(소령)는 피투성이가 돼 숨져가고 있는 간호군관(간호장교) 이경숙을 끌어안고 자신이 입고 있던 러닝셔츠를 찢어 지혈시키면서 목놓아 통곡했다. 이경숙 간호군관은 붕대 한 조각, 약 한 첩 구하지 못해 속수무책으로 죽어가는 부상자들을 끌어안고 흐느끼다가 자신도 파편에 맞아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야전구호처에는 낙동강 전선에 투입된 이래 수술도구는커녕 소독약 한 방울, 붕대 한 조각도 남아 있지 않았다. 장지혁은 맨손으로 하늘만 쳐다보다 수만구의 시신을 낙동강 유역에 방치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후퇴명령이 떨어지자 수천명의 부상자들에게 붕대 한 조각 감아주지 못한 죄밑이 돼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으나 그들의 울부짖음을 뒤로 한 채 창황히 몸만 빠져 나왔다. 그는 총소리만 들어도 놀란 노루새끼처럼 무작정 쫓기며 추풍령을 넘어 속리산을 타고 죽을 고비도 여러 차례 넘겼다.

천신만고 끝에 포탄이 비 오듯 쏟아지는 탄막을 뚫고 가까스로 수안보의 전선사령부로 찾아갔으나 모두 텅 비어 있었다. 미 공군 전폭기편대가 하늘을 새까맣게 뒤덮고 폭탄을 퍼부어대는 바람에 미처 정신을 가다듬을 겨를도 없이 다시 쫓기다 추격해 오는 국군에 투항했다.

인민군은 개전 초기 불과 2주일 정도 버틸 수 있는 전력으로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을 비롯한 참전 16개국의 유엔군을 상대로 3개월 간에 걸쳐 용전분투했다.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하고, 쉬지도 못하고, 부상을 당해도 기초적인 응급치료마저 받지 못한 채 오직 돌격명령과 사수명령만을 수행하기 위해 초개와 같이 목숨을 버리며 싸웠다. 현기증이 나는 낭떠러지 고지에서 싸우고, 쇠사슬에 발이 묶인 채 독전대의 싸늘한 총구를 의식하며 진흙탕 참호 속에서 싸우고, 뗏목으로 강을 건너 총탄이 비 오듯 하는 적진을 돌파했으며 선혈이 낭자한 백병전으로 사생결단하고 싸웠다.

그래서 태백산과 소백산의 우거진 나무와 바위에 피칠갑을 하고 낙동강 굽이치는 물결이 시뻘건 핏빛으로 변해 모래펄까지 인민군 전사들의 선혈로 물들이며 대구로 진격해 들어갈 기회만 노렸다. 하지만 한·미 연합군은 대구를 사수했고 도도히 흐르는 낙동강은 모질게도 수만명에 달하는 인민군 전사들의 피를 삼켰다. 누가 꿈많은 20대 전후의 젊은 청년들을 낙동강 물귀신으로 만들었는가?

그 젊은 전사들을 가열한 전장으로 몰아넣은 북한공산집단의 수령 김일성은 언제 그들에게 따뜻한 밥 한 끼 주었으며 구두 한 켤레 지급했던가. 부상을 입고 쓰러진 전사들에게 붕대 한 조각 감아주고 약 한 알 주었던가. 아무것도 없었다. 가을철 단풍처럼 핏빛으로 물든 삼천리 방방곡곡에는 아들 잃고 남편 잃고 아버지 잃은 부녀자들의 애절한 통곡만 메아리치고 있었다.

이용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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