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수 중에 잔치국수를 가장 좋아한다. 간단명료하고 단순소박하기 때문이다. 콩국수는 걸쭉한 콩의 기운이 싫고 칼국수는 잡다한 채소들의 난립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잔치국수는 '정구지'(부추의 사투리)를 함께 넣어 끓이면 파릇한 기운이 시각을 통해 입맛을 자극한다.
고명이래야 볶은 '애호박'을 푸짐하게 얹고 갖은 양념으로 간을 맞춰 몇 번 후루룩하면 한끼 점심으로나 새참으로도 그만이다.
그 갖은양념이란 것이 약간 '꼬꾸랍긴'(어렵고 복잡하다는 고향 사투리)하다. 조선간장에 우선 고춧가루를 풀어 전체 배경을 붉은 색으로 치장한 후 다시 붉고 푸른 풋고추를 다져 넣는다. 칼자루로 으깬 마늘과 파의 흰 뿌리 부분을 쫑쫑 썬 다음 깨소금을 뿌린다. 그리고 참기름, 그것도 우리 산천에서 재배한 참깨로 짠 기름을 듬뿍 넣으면 잔치국수의 양념으론 환상적이다. 중세 유럽의 황제들도 이 맛을 한번 보았으면 자주 주방장을 불러 "코리언 웨딩 누들, 플리즈"를 외쳤을 것이다.
#가난 때문에 잔치국수도 제대로 못먹어
어릴 적 여름 저녁은 나물을 많이 넣은 갱죽으로 때우거나 멀건 물 국수로 배를 채우는 경우가 많았다. 양식을 아끼기 위함이다. 어머니는 돈 주고 사와야 하는 타래 국수로 잔치국수를 끓여 먹으면 혓바늘이 돋을 것처럼 경계하셨다. 모두가 가난 탓이었다. 잔치국수도 제대로 먹어보지 못하고 자란 것이 한이 되긴 하지만 잘 먹고 자란 녀석들보다 키가 더 커졌으니 천만 다행이다. 키는 영양에 비례한다지만 나는 돌연변이 품종인 모양이다.
한 가지 음식이 같은 맛을 내지는 않는다. 재료와 손맛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때와 장소도 무시하지 못한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누구와 먹느냐'다. 평소 밥맛 없는 놈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과 함께 식탁에 앉으면 입맛이 떨어진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던 밥이 거꾸로 다시 넘어온다. 그런 사람이 되어선 안 된다는 게 나의 생활신조다.
#쫄깃한 국수'김장김치 조화 '예술'
이십여년 전 어느 해 여름 남해 욕지도에서 아주 맛있는 잔치국수를 먹은 적이 있다. 한국탐험협회(회장 고 장갑득 영남대 교수) 대원 8, 9명이 스쿠버 다이빙을 하기 위해 통영에 도착했다. 공기통 14개에 장비까지 합치니 통통배가 비좁을 정도였다. 고기가 많다는 소문을 듣고 상노대도로 들어갔으나 입도를 거절당했고 하노대도로 갔으나 마찬가지였다.
마침 연줄을 대 우도로 들어가 3박을 한 후 밤새 소주를 너무 마셔 쓰린 속을 안고 욕지도로 철수했다. 마땅한 먹을거리가 없어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노천 샘에서 갓 삶은 국수를 씻고 있는 할머니를 만났다. "국수 좀 끓여줄 수 있겠습니까." "돈만 주면 얼마든지 삶아 주지요."
국수를 삶는 시간보다 씻는 시간이 더 오래 걸렸다. 퐁퐁 솟는 샘물에다 소쿠리에 담긴 국수를 풀기 하나 없이 씻고 또 씻었다. 그러고는 응달에 묻혀 있는 독에서 김장김치를 꺼내 그것도 깨끗하게 씻은 다음 채를 쳤다. "젊은 사람인께 많이 먹겄제" 하시며 푸짐하게 담아내셨다. 멸치를 우려낸 국물 맛이 그만인데다 쫄깃한 국수와 채 썬 김장김치의 조화는 화음이 기가 막힌 4중주 실내악을 듣는 바로 그런 기분이었다. 욕지도 선창가에서 퍼질러 앉아 먹었던 그 국수 맛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건 국수가 아니라 예술이었다.
잔치국수 하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지난해 이승을 떠난 만능 스포츠맨인 ROTC 동기생이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운명의 날을 기다리면서 어느 수녀님이 가져다 준 잔치국수가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는 얘기를 문병 차 들른 내게 들려주었다. '맛있는 국수 한 그릇을 먹여 먼 길을 떠나보내야지'하고 다짐하면서 병실을 나왔다. 그러나 그가 너무 서둘러 떠나는 바람에 내가 나에게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그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잔치국수는 여러 모로 내게 한을 남겨준 음식이다. 오, 코리안 웨딩 누들!
구활(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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