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평화벨트, 경북 브랜드로]<4>포항·경주전투

입력 2010-06-24 10:45:15

'연제근 상사' 의생으로 北進 돌파구 마련

안강·기계전투를 기리기 위해 6·25전쟁 휴전 5년 뒤인 1958년 10월, 육군 제1205 건설 공병단이 경주 강동면 인동리에
안강·기계전투를 기리기 위해 6·25전쟁 휴전 5년 뒤인 1958년 10월, 육군 제1205 건설 공병단이 경주 강동면 인동리에 '안강지구 전승비'를 세웠다.

포항 형산강 도하작전 등 1950년 8월 9일부터 9월 22일까지 44일간 계속된 포항지구 전투는 적들과 뺏고 빼앗기는 치열한 격전과 승리로 6·25전쟁에 큰 획을 그었다. 긴 공방전을 통해 아군은 2천301명이 전사한 반면 적은 1만5천343명이 사살된 것으로 전사는 기록하고 있다.

경주 안강·기계전투는 안강읍 어래산 곤제봉을 경계로 47일간 공방전을 벌여 고지의 주인이 17차례나 바뀌는 치열한 전투였다. 특히 '다부동전투' '영천전투' 등 6·25 당시 최대 격전으로 꼽히는 3대 전투 가운데 가장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포항 형산강 도하작전

맥아더장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북진에 나선 유엔군과 국군은 낙동강 최후의 방어선으로 삼은 포항 형산강 도하작전으로 대대적인 동해안 반격을 시작한다. 적에게 포항시가지를 빼앗기고 형산강에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한 22, 23, 26연대로 구성된 3사단은 1950년 9월 14일부터 포항시가지 탈환 등 반격의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해 형산강 도하작전에 나선다. 그러나 4일간 계속 내린 폭우로 개인 참호마다 물이 차올랐고 강 수위가 높아지는 등 이 작전은 출발부터 악조건의 연속이었다. 형산강을 건너던 26연대의 많은 장병들은 적의 집중 화력으로 강물에 빠져 영일만으로 떠내려갔고, 22연대와 23연대는 3차례에 걸쳐 수중 도하작전을 감행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22연대 1대대 분대장이던 연제근 상사는 17일 밤 10여명의 돌격대원을 이끌고 형산강 도하에 성공해 포항 탈환의 결정적 공훈을 세웠다. 수류탄을 몸에 매달고 수중포복으로 돌진하던 연 상사는 적의 기관총 사격으로 중상을 입었으나 끝까지 도하해 3발의 수류탄 투척으로 적의 기관총 진지를 파괴했다. 장렬히 전사한 연 상사의 전공에 힘입어 22연대는 포항지구를 수복하고 북진의 결정적인 전기를 마련했다. 북한군 5사단의 주력부대 방어선을 완전히 붕괴시킨 국군과 연합군은 영덕, 강릉을 점령하고 9월 30일 38선 남쪽 2㎞ 지점까지 진격했다.

정부는 연 상사의 전공을 기려 2계급 특진과 함께 을지무공훈장과 화랑무공훈장을 추서했고, 2001년 고향인 충북 괴산군 도안면 주민들은 모교인 도안초교에 연 상사의 흉상을 건립했다. 포항시는 6·25전쟁 60주년 기념사업으로 해도공원에 '연제근 영웅' 특공대상과 국가유공자 명예선양비 건립사업을 하고 있다.

◆경주 안강·기계전투

1950년 6·25가 발발한 지 한 달 보름이 지난 8월 8일 북한군 12사단은 이미 영천 보현산 구암산 일대에 침투한 제766부대와 연계, 전차와 지원 포병으로 증강된 1연대 규모의 병력을 청송과 현동, 죽장, 기계 축선에 투입해 포항 죽장을 점령했다. 국군은 청송에서 기계에 이르는 유일한 통로인 31번 국도가 워낙 험준한 산악지대를 통과하는 터여서 북한군 대부대가 기동하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국군은 사태가 이렇게 급박하게 돌아갔지만 별다른 대책을 내놓을 수 없었다. 그 사이에 북한군은 8월 10일 기계까지 남하했다. 북한군이 계속 안강-경주 방향으로 진출한다면 낙동강 방어선의 중앙은 완전히 두 동강 날 위기에 처했다.

이에 육군본부는 포항지구 전투사령부를 설치, 방어에 나섰지만 가용병력이 모자라 훈련이 안 된 학도병과 신병, 대한청년단원들로 구성된 병력을 투입해 개전 초 의정부 방어전에서의 실수를 되풀이했다. 전세는 고전을 면치 못했으나 유엔 해·공군의 쉴 틈 없는 후방공격으로 북한군 제12사단도 보급 부족으로 진격을 멈추고 말았다. 이 틈에 8월 12일 제17연대가 안강에 도착해 안강-포항 간 도로를 차단했고 다음날 수도사단 제1연대와 제26연대도 안강에 속속 도착, 북한군의 경주 진출을 막았다. 수도사단 제18연대와 독립기갑연대가 기계 북쪽에서 북한군 후방을 차단하면서 순식간에 북한군 제12사단을 역포위하는 데 성공했다. 기계 일대에서 북한군에 대한 총공격이 시작됐다.

이 전투는 전쟁 발발 후 국군이 거둔 최대의 전과였으며, 북한군의 남침으로 계속됐던 국군과 UN군의 후퇴에 종지부를 찍은 전투로 한국전쟁사에 기록되고 있다.

포항·강병서기자 kbs@msnet.co.kr

경주·이채수기자 cslee@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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