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간 혈투 끝 적15사단 괴멸, 낙동강 교두보 사수
김일성은 낙동강 전선의 8월 공세에 이어 9월 공세에서도 초반부터 패색이 짙어가고 있었으나 결코 영천을 포기할 수 없었다. 영천만 확보하고 공격 방향을 동남쪽으로 틀 수 있다면 대구는 굳이 공격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고립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영천 점령에 이어 내처 대한민국의 임시수도인 부산으로 밀고 들어가면 그가 애초 목적했던 대로 한반도의 적화통일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신념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런 점에서 영천은 매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그래서 김일성은 영천을 점령하는 데 마지막 도박을 걸었던 것이다. 영천은 서쪽으로 대구 후면(後面)에 위치해 있는 반면 동쪽으로는 경주와 지척의 거리였다. 그리고 남쪽으로는 경산과 청도, 밀양이 있어 부산을 공략하기 위한 길목으로는 안성맞춤이었다.
9월 4일 전선사령관 김책은 김일성의 밀명(密命)에 따라 의성에서 기동 중이던 8사단과 상주 화령장에서 아군에 패퇴한 15사단을 재편해 영천을 뚫고 들어가도록 정치명령(작전명령)을 하달한다. 개전 초기 예비사단으로 있다 중부전선에 투입된 이후 아군에 당하기만 하던 적 15사단은 결코 조조군사가 아니었다. 화령장 전투 패퇴로 사단장 박성철 소장이 해임되고 후임으로 팔로군 출신인 조광철 소장이 부임하면서 재편성된 이후 강력한 돌격사단으로 탈바꿈해 있었다.
신임 사단장 조광철은 무정군단(제2집단군) 김무정 사령관이 아끼는 심복으로 사단장에 취임하자마자 분대장급 이상을 모두 팔로군의 조선의용군 출신 상급전사(하사관)들로 교체해 명실상부한 정예 돌격부대를 만들었다. 그러고는 8월 공세 때 다부동의 전면에서 미 제1기병사단과 한국군 제1사단 전면에서 격렬하게 대치하다가 동쪽으로 우회하여 영천을 기습하게 된 것이다.
아군 8사단이 지키고 있던 영천 자양 방면으로 침투해온 적 15사단은 9월 5일 새벽 T-34 탱크 10대를 앞세우고 기습 공격을 감행해 이날 밤에는 군위 효령, 의흥 방면으로 침투해온 적 8사단과 협공으로 영천을 점령하고 만다. 적의 집중포화로 영천의 밤하늘은 온통 불덩어리로 변했다.
아군 8사단과 적 8사단은 같은 8사단끼리 영주에서부터 예천·안동을 거치는 동안 줄곧 격돌해온 숙적이었다. 게다가 영천을 지키고 있던 아군 8사단은 제16·21연대 등 2개 연대밖에 없었다. 예비대인 10연대를 포항 일원에서 작전 중인 3사단에 배속해 버렸기 때문이다. 억수장마로 연일 폭우가 쏟아지는 바람에 아군은 영천회전에서 미 공군 전폭기의 지원도 받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사생결단하고 덤벼드는 적을 제대로 막지 못하고 밀려나야 했다.
영천이 적의 수중에 떨어지면서 전세가 역전돼 대구를 비롯한 낙동강 교두보에 일대 위기가 닥쳤다. 하양의 전방지휘소를 지키고 있던 제2군단장 유재흥 장군은 영천이 적의 수중에 떨어졌다는 보고를 접한 즉시 다부동 전선과 그 북방에서 전투 중이던 제1사단 11연대와 6사단 19연대를 빼내 황급히 영천 전투에 투입했다.
아군 8사단은 이들 증원 부대가 투입되자 영천 탈환작전에 돌입했으나 적 2개 사단의 화력이 워낙 강렬한 데다 일부 주력이 영천을 빠져나와 경주 방면으로 남하하는 바람에 이를 저지하기 위해 영천 탈환작전에 투입된 병력과 장비를 다시 빼돌려야 했다. 적 8사단이 영천을 빠져나가 경주로 향한 것은 건천에서 바로 청도를 치고 밀양을 점령할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오직 부산 점령만 외치는 김일성의 독전에 그만큼 다급했던 것이다. 밀양만 점령하면 양산과 구포를 거쳐 부산은 바로 지척의 거리였다.
그 당시 국군 8사단 소속으로 영천 회전에 참전했던 반집환(80·대구시 수성구 매호동) 당시 일병은 "영천을 다시 탈환하지 못했다면 대구-영천-경주-포항을 잇는 낙동강 방어선의 유일무이한 보급로가 끊겨 아군은 고립무원의 처지에 놓이게 되고 부산 함락도 시간 문제였다" 며 "지금 생각해도 아찔했던 순간이었다"고 회고했다.
한편 영천 북방 자양 방면에서 사주방어진을 치고 있던 김용배 대령(전 육군참모총장)의 21연대는 적 15사단의 주력인 45·73·103연대 등 3개 연대가 한꺼번에 몰려와 포위하는 바람에 고립무원에 빠지고 만다. 그러나 김 대령은 침착하게 급박한 상황에 대처했다. 집중공격을 가해오는 막강한 적에 비해 연대 전력이 극히 열세한 점을 감안, 가능한 한 정면대결을 피했다.
그는 우선 넓게 퍼진 연대의 사주방어망을 4킬로미터 안으로 좁히면서 용의주도하게 유리한 지형을 이용해 은폐와 차폐를 되풀이하며 적을 지치게 만들었다. 강력한 곳을 피하고(强而避之) 방비가 없는 곳(攻其無備)을 불의에 기습하라(出其不意)는 손자병법을 원용한 이른바 '김용배 전략'이었다. 이 무렵 군단 지휘소와 사단 지휘소에서는 21연대가 적에 포위돼 전멸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김 대령은 각 대대장들에게도 대대나 중대 단위의 접전을 피하고 그 대신 1개 분대 또는 2개 분대씩 특공대를 조직, 여러 방향에서 적을 기습하며 적진을 교란하도록 했다. 손자병법의 출기불의(出其不意) 전략이었다. 그 결과 예상 외로 적에게 많은 타격을 주며 지휘체계에 혼란을 일으켰다. 특히 9월 7일의 승전보는 한마디로 기적 같은 쾌승이 아닐 수 없다.
이날 새벽 5시쯤 제2대대 5중대 2소대가 매복해 있는 진지에서 약 500m 떨어진 345고지를 적이 점령한 데다 안개 자욱한 300m 전방의 고지 아래에서는 적 1개 대대 병력이 전투 대형을 갖춰 올라오고 있었다. 이를 관측한 소대장 김재의 소위는 중대본부에 급히 보고하려 했으나 유·무선이 모두 불통이었다. 진퇴양난…. 그러나 용장(勇將) 밑에 용병(勇兵)이 있다고 김용배 대령의 지휘에 단련된 김 소위는 과감하게 대응키로 결심한다.
그는 개인호 속에 경기관총 2문과 자동소총 3문으로 화망구성을 해놓고 사수들을 제외한 전 대원들을 현 위치에서 관측이 용이한 고지 아래에 매복시켰다. 아군 진지의 위쪽 345고지를 이미 적이 점령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 소위의 민첩한 화망구성과 병력배치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적은 유유히 능선을 타고 고지로 오르고 있었다.
김 소위는 우측 1분대를 능선을 타고 오르는 적을 향해 배치하고 좌측 3분대는 능선 아래 계곡에 머물러 있는 적의 정면에 배치했다. 그리고 중앙의 2분대와 경기관총 사수는 후속부대로 증원되는 적이 사정권 안에 들어오기를 기다리다 일제히 사격을 개시했다. 뜻밖의 기습에 혼비백산한 적은 미처 응사할 겨를도 없이 우왕좌왕하다가 그대로 나뒹굴었다.
3시간여 일방적인 공격으로 사격을 가하다 보니 실탄이 바닥나기 시작했다. 대원들은 실탄을 아끼면서 적진을 향해 수류탄을 자그마치 150여발이나 던졌다. 적진에서도 아군을 향해 방망이 수류탄을 던졌으나 계곡 아래에서 위쪽으로 투척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칫 잘못 던지면 그것이 다시 적진으로 되돌아가 자폭하기 마련이었다. 게다가 살아남은 적 전사들마저 능선 아래로 도망치다 독전대의 총격을 받고 다시 고지를 오르는 순간 아군의 총격을 받고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몰살당하는 등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아군 2소대는 천혜의 지형지물을 이용해 적 1개 대대를 섬멸하는 엄청난 전과를 올렸다. 아군은 이 전투에서 무기를 버리고 무조건 투항하는 적 군사군관 3명을 비롯해 전사 83명을 생포했다. 소대장 김 소위는 이어 2km나 떨어진 적 연대 지휘소까지 추격전을 벌여 마침 총성을 듣고 뛰쳐나오던 적 연대장까지 사살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용우(언론인 ·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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