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만큼 스포츠가 번영을 누린 때는 없었던 것 같다. 스포츠 관련 산업은 다른 어떤 분야보다 성장세가 가파르다. 그 원인을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으나 현대 사회의 특성과 관련지어 살펴보는 게 제법 타당하지 않을까 싶다.
오늘날 사회의 특성은 여러 사상가들이 입 모아 말하듯이 가상, 곧 시뮬라르크의 세계이다. 사물과 실체 사이에는 등식(等式)이 성립되지 않을뿐더러 실체와 동떨어진 가짜 사물이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다. 특히 인터넷에 의해 우리는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사이버 세계에 매일 접속하며 살고 있다. 이러한 사이버 세계에서는 당연히 주체(主體)가 힘을 잃을 수밖에 없고 육체는 무력해진다.
하지만 우리에겐 육체에 대한 그리움이 있다. 사이버라는 가짜 실체가 춤을 출수록 결코 가짜가 될 수 없는 우리 자신의 몸을 향수한다. 육체는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최소한의 실체인 것이다. 그 육체가 생생히 감각되는 곳이 바로 스포츠이다. 스포츠는 반 시뮬라르크의 형태이고, 반 사이버의 세계에 속한다. 그러니까 오늘날 맹위를 떨치고 있는 스포츠는 현대의 특성을 거스르고 싶어하는 인간의 귀속적인 욕망에 기인하다고 말할 수 있다.
사실 스포츠가 오늘날에 이르러서 이만큼 번성하게 된 것은 틀림없이 우연한 일이다. 근대적인 스포츠 경기가 처음 시작될 무렵에는 지금처럼 거대한 시장이 형성되리라고 예측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대공황 때 미국 프로야구가 폭발을 일으킨 것이나 나치 시대의 올림픽을 보면 당시 스포츠는 국민을 결속시키는 조력자 혹은 시녀 노릇을 담당해왔다. 물론 옛 그리스 도시를 압도했던 고대 올림피아 제전도 성격이 크게 다르지 않다. 가까이로는 우리나라에서도 프로 스포츠가 군사정권의 우민화 전략의 하나로 시작되었다는 얘기가 있지 않은가. 체제 이데올로기의 조력자 역할을 하던 스포츠는 오늘날 뜻밖으로 시뮬라르크라는 사회현상과 반발적으로 맞물리면서 번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일찌감치 스포츠가 발달한 서구에서는 여러 세대를 거치는 동안 중요한 정신 문화의 일부를 감당해왔다는 점이다. 스포츠가 보여준 정신 문화의 예를 들자면 끝이 없다. 9'11테러가 벌어졌을 때 미국 프로야구의 분위기는 야구장이 단순히 즐기기만 하는 곳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오, 새이 캔 유 시'로 시작되는 노래를 합창하고, 커트 실링 같은 유명 선수들이 운동장에서 기막힌 명언으로 추모 인터뷰를 하여 실의에 빠진 국민들을 감동시켰다. 야구만큼 섬세하지 않다 해도 최근 유럽 축구의 챔피언스리그에서 우승한 조제 무리뉴 감독의 언행은 축구장을 넘어선 명장의 품격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우리나라에도 감동적인 스포츠인들이 여럿 있다. 영원한 마라토너라고 하는 이봉주 선수나 국가대표를 사퇴하며 눈물을 흘리던 박찬호 선수를 보면서 스포츠 정신이 무엇인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물론 성적 지상주의와 돈벌이에 골몰해있는 선수가 대부분이긴 하지만 역사가 짧으니 어쩔 도리 없겠다. 스포츠를 달리 생각하는 대중들이 많아지면 각별한 스포츠인들도 곳곳에서 출현할 게 아닌가.
오늘 저녁부터 한 달 동안 잠 못 드는 밤이 시작된다. 바로 남아공 2010년 월드컵이다. 4강까지 올랐던 2002년처럼 도시 곳곳에서 거리 응원이 펼쳐진다고 한다. 국제 축구경기에 대해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정말 유별스럽다. 내 어린 시절에도 말레이시아나 미얀마(버마)와 경기가 벌어지는 날에는 여간 난리가 아니었다. 평소 축구에 전혀 무관심한 이들일수록 우리나라가 질까봐 더욱 안절부절못했다. 골을 넣으면 환호를 지르다 심장마비를 일으켜 사망하는 어르신들도 꼭 한둘씩 있었다. 우리가 그렇게 떠들썩했던 건 축구 자체만 관람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더러는 승리에 집착했지만 많은 이들이 축구를 통해 우리 민족의 모습을 엿보았던 셈이다.
비로소 경기가 시작되면 위대한 스포츠인들이 나타나게 된다. 그들은 경기를 우수하게 이끌기도 하거니와 승패와 무관하게 경기장 안팎에서 우리를 감동시키는 뛰어난 태도를 보여준다. 이번 남아공 월드컵에서, 우리를 감동시키는 위대한 선수가 다른 나라가 아닌 대한민국 선수단에서 출현하면 더욱 좋겠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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