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길 주막터 돌담 틈 야생화는 세월의 흔적을 담고…
산이 깨어났다. 소백산이 깨어났다. 초록빛 너른 마당이 펼쳐졌고, 그 위로 햇살이 널을 뛴다. 초록이 지쳐 단풍 든 산도 예쁘지만, 역시 길맛을 느끼려면 여린 잎사귀가 앙증맞게 피어나는 초여름 산이 제격이다. 그런 산에서는 향기마저 푸르다.
숲 속에선 숲을 모르듯이 길 위에 서면 길을 알 수 없다. 왜 굳이 이곳으로 길이 났는지 까닭을 알지 못한 채 걸음을 옮기게 된다. 그저 길이 있으니 걸을 뿐이다. 죽령옛길도 마찬가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아달라왕 5년(서기 158년)에 신라사람 죽죽(竹竹)이 길을 열었다고 한다. 무려 1천800여년의 역사를 간직한 길인 셈이다. 영주시 풍기읍 수철리에 있는 중앙선 소백산역(희방사역)에서 출발해 죽령옛길을 따라 걸으며 내내 의문이 들었다. 왜 하필 이곳이었을까? 심지어 동국여지승람에는 길을 개척한 죽죽이 지쳐서 순직하고, 고갯마루에 이를 기리는 사당이 있었다고 전한다. 길을 연 사람마저 지쳐서 숨을 거둘 만큼 험난한 고개가 바로 죽령이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고갯마루에 올라서 안내글을 보고서야 의문이 풀렸다. 그리고 다시 풍기 땅에 내려와 소백산 자락을 바라보면서 죽령옛길이 이곳으로 날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풍기에서 북서쪽을 바라보면 소백산 자락이 에워싸듯 내려앉았다. 오른편에 가장 높은 봉우리가 해발고도 1천383m 연화봉이고, 조금 왼쪽에 제2연화봉(1,357m)이 솟아있으며, 잠시 힘을 빼는 듯 주저앉았다가 왼편에 다시 봉우리가 솟았으니 도솔봉(1,314m)이다. 제2연화봉과 도솔봉 사이에 푹 꺼진 줄기(689m)가 바로 죽령옛길이 난 곳.
여기서 직선거리로만 100여리 떨어진 남서쪽에 가야 문경새재가 있고, 길을 따라 가려면 200리는 족히 걸어야 한다. 경상도 동북지역에서 소백산맥 줄기를 넘어 한양 땅에 이르려면 가장 짧은 구간이 바로 죽령옛길이었다. 길 안내를 맡은 박석홍 소수서원 학예연구원은 "산을 넘는 옛길은 예외없이 물길과 가까운데 이는 당연한 일"이라며 "산줄기 어디에선가 솟아난 물줄기는 낮은 곳으로 흐르게 마련이고, 이런 계곡을 따라 오르는 것은 산을 거역하지않는 순리인 셈"이라고 했다. 하지만 신작로가 나면서 순리는 잊혀졌고, 빠른 것이 지상과제가 된 현대에 이르러서는 산을 뚫고 고속도로와 철길을 내는 것이 당연해졌다.
죽령옛길도 계곡과 함께한다. 돌 사이를 흘러내리는 계곡물이 경쾌한 타악기라면 나뭇가지를 통통거리는 새의 쉴 새 없는 지저귐은 관악기, 가지와 잎새를 쓰다듬 듯 스쳐가는 바람소리는 현악기인 셈이다. 산길을 걸을 때면 잠시 말을 멈추고 귀를 기울여보라. 산이 들려주는 오케스트라의 웅장하고 섬세한 연주가 가슴을 뛰게 할테니. 오늘 걸은 길에서 이런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하지만 2천년 가까운 세월동안 숱한 사람들이 이 길을 오가며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을 터. 장삿길에 나선 부보상들은 단양장과 풍기장에서 있었던 일들을 주고받으며 서로 장사 걱정을 했을 것이고, 청운의 꿈을 안고 한양땅으로 향하던 선비들은 과거 때문에 걸음이 무거웠을 것이며, 새 임지로 떠나는 관리들은 변화에 대한 두려움과 설렘이 교차했을 것이다. 게다가 삼국시대만 해도 고구려와 신라의 접경지역이었던 탓에 수차례 뺏고 빼앗기기를 반복하며 격전이 벌어졌다. 옛길 옆을 흐르는 계곡은 붉게 변했고, 길 옆 아름드리 나무 사이로 주검이 가득했던 때도 있었으리라. 무려 1천500년 전의 일이지만 옛길로 접어들면 시간의 틈새는 온데간데 없어진다.
옛길 중간에는 한때 번창했을 주막터가 남아있다. 무너진 돌담 위로 온갖 잡초와 야생화가 가득하다. 비록 무너져내리긴 했어도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해 정겨움은 여전하다. 돌담 사이로 부지런히 오가는 주모와 산나물 무침에 막걸리 한 잔을 걸치며 피로를 씻어내는 나그네의 모습이 환영처럼 다가온다. 이곳의 주막은 쉼터이자 꿈터이고, 사람을 이어주는 마음의 다리였으리라.
옛길에는 전설도 많다. 도솔봉 골짜기에 살던 한 욕심꾸러기 농부의 이야기도 전한다. 풍기장날이면 산에서 한 초립동자가 내려와 장터에 갔다가 해가 지면 산으로 돌아갔더란다. 도솔봉에 있다는 오래 된 산삼이 사람으로 변한 것임을 눈치 챈 농부는 어느 날 작정을 하고 초립동자를 따라가 장터에서 음식을 대접했다. 돌아오는 길에 초립동자는 농부의 이야기를 듣고 산삼밭을 알려줬다. 다만 가장 큰 산삼은 뽑지마라는 당부와 함께. 하지만 사람 욕심이 어디 그런가. 역시나 약속을 어기고 농부가 가장 큰 산삼을 뽑아들자 삼 뇌두만 뽑히고 장터에서 먹은 음식들이 쏟아졌단다. 그 너른 산삼밭은 온데간데 없고 부추밭과 옻나무밭만 남았더라는 이야기다.
안동에 있던 거대한 종을 강원도 오대산 상원사로 옮기던 중 벌어진 기이한 일도 전해진다. 아울러 신라 효소왕 때 득오곡(得烏谷)이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화랑 죽지랑을 그리며 지었다는 향가 '모죽지랑가'의 이야기도 죽령옛길과 닿아있다.
옛길을 오르는 도중에 심심찮게 이런 이야기를 담은 안내판이 나온다. 이야기를 전하는 정성은 갸륵하지만 안내판 모양새는 영 마뜩잖다. 어른 가슴께에서 45도로 눕혀놓았으니 햇살에 반사돼 글자도 알아보기 힘들고, 내리치는 눈비에 안내판 표면도 많이 상했다. 똑바로 세워놓았으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쉽게 읽을 것을 괜스레 멋을 내다보니 제 역할만 놓친 셈이 됐다.
고갯마루에는 공사가 한창이다. 6월 말까지 전망누각을 짓는다고 한다. 고개에 올라서면 저 멀리 풍기읍이 보이고, 맑은 날이면 아파트가 삐죽 솟은 영주까지 눈에 들어온다. 전망누각에 올라선다고 더 잘 보이는 것도 아닐터인데. 2천년 역사를 자랑하는 옛길을 올라서서 만나는 5번 국도의 아스팔트 내음도 생경스러운데, 새삼스레 지어올린 누각의 날카로움은 더욱 씁쓸하다.
죽령옛길을 찾기는 쉽다. 중앙고속도로 풍기나들목에서 내려선 뒤 풍기쪽으로 우회전하면 봉현교차로를 만난다. 거기서 좌회전하자마자 오른편 도로로 빠지면 단양으로 가는 5번 국도에 접어든다. 10분쯤 달리다가 왼편 풍기읍 수철리와 소백산역을 알리는 표지판이 있는 곳에서 좌회전하면 중앙선 소백산역(희방사역)이 나온다. 근처에 주차를 한 뒤 안내판을 따라 산행을 시작하면 된다.
글·사진=김수용기자 ksy@msnet.co.kr
도움말=소수서원 학예연구원 박석홍 054)634-3310
전시장소 협찬=대백프라자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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