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이제 다 지나가고 여름이 한창 시작될 무렵인 6월 첫번째 주말인데 아직도 아침저녁으론 선선하다 못해 손발이 시릴 때가 있다. 올 한 해는 이렇게 '이상기온' '기상이변'이라는 말을 내내 입에 달고 사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든다.
1826년 6월 5일 독일 '낭만 오페라'(romantische oper)를 확립했던 카를 마리아 폰 베버(Carl Maria von Weber)가 런던에서 세상을 떠났다. 1786년 11월 19일 독일 북부 오이틴에서 태어난 베버는 장교, 관리, 지휘자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 순회극단을 경영하게 된 부모 덕분에 어릴 적부터 음악과 친해질 수 있었다. 순회극단의 중심 레퍼토리라고 할 수 있는 극음악과의 만남은 결국 베버를 독일 낭만 오페라 작곡의 선구적 역할을 하게 만들고 뛰어난 오케스트라 지휘자로서의 능력을 발휘하게 한 것이다. 베버는 또한 모차르트의 첫사랑이었던 알로이지아(Aloysia Weber)와 모차르트의 아내가 된 콘스탄체(Constanze Weber·1762~1842)의 사촌이기도 하다.
부모의 순회극단 생활 때문인지 1810년까지의 베버의 유년시절과 청년시절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게 없다. 1813년부터 당시 보헤미아의 수도 프라하 극장에서 상임지휘를 맡고 있던 베버는 1814년 베토벤의 희가극(喜歌劇) '피델리오'를 비엔나를 벗어나 최초로 초연하고 이 연주가 성공을 거두면서 독일 낭만주의 극음악에 대한 열정과 관심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1817년 30세의 나이로 세상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드레스덴 국립 가극장 (Staatskapelle Dresden)의 상임지휘자가 되면서 지휘자로서의 삶도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드레스덴 국립 가극장은 1548년 작센 선제후의 칙명에 의해 조직된 후 바로크 시대 독일 교회음악의 대가 하인리히 쉬츠(Heinrich Schutz·1585~1672)가 악장을 지낸 바 있고 베버 이후 독일 오페라 발전에 기여하면서 낭만주의 독일 오페라의 거장 바그너(Richard Wagner·1813~1883)가 상임지휘자를 맡기도 했던 독일 오페라 발전의 역사적 증거가 되는 중요한 극장이다.
1812년 이미 '낭만 오페라'라는 양식의 '실바나'(Silvana)를 작곡해 극음악 작곡에 대한 재능을 보여주었던 베버는 1817년부터 시작한 '마탄의 사수'(Der Freischutz)를 1821년 완성해 그해 6월 18일 베를린 국립극장 (Berlin Schauspielhaus)에서 초연했다. 연주는 그야말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 자리에는 당시 독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곡가이자 지휘자였던 멘델스존(Felix Mendelssohn·1809~1847)을 비롯해 시인 하이네, 음악비평가이자 작곡가였던 호프만(E. T. A. Hoffmann·1776~1822)이 함께 있었다. 그날의 감격을 베버는 일기에 이렇게 쓰고 있다.
"이 이상의 열광은 생각할 수조차 없다. 장래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 두려울 정도다. 아마 이 이상의 성공은 다시 없을 것이다."
오늘날 베버를 오페라 극장의 오케스트라를 맡아 책임지는 상임지휘자로서 최초의 인물이라고 말하고, 지휘봉을 사용한 첫번째 사람이라고 얘기한다. 또한 베버는 낭만주의 시대 독일인들에게 이탈리아 오페라 감상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독일적 민족 감정, 민속 선율을 조화시킨 독일 국민오페라 작곡의 최초 인물이라고 평가된다. 모차르트의 '마술피리'와 베토벤의 '피델리오'도 중요하지만 베버의 '마탄의 사수'가 있었기에 바그너라는 위대한 독일 낭만 오페라의 대가가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이다.
최영애 영남대 겸임교수
댓글 많은 뉴스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
"TK신공항, 전북 전주에 밀렸다"…국토위 파행, 여야 대치에 '영호남' 소환
헌재, 감사원장·검사 탄핵 '전원일치' 기각…尹 사건 가늠자 될까
'탄핵안 줄기각'에 민주 "예상 못했다…인용 가능성 높게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