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북구 침산동의 한 PC방. 초등학교 6학년쯤 돼 보이는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FPS게임(1인칭 슈팅 게임)에 한창 빠져 있었다. 친구들끼리 팀을 이뤄 다른 팀과 게임을 하고 있는데 오가는 대화가 듣기 민망할 정도였다. "이 씨X, 빨리 이쪽으로 와" "이 새X, 존X 빠르네" "야 십XX야, 뭐 하노" 등 욕이 들어가지 않는 말이 없었다. 욕을 하는 아이나 욕을 듣는 아이나 평소 모습인 듯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다. PC방 주인은 "일반인이나 대학생보다 초'중학생들이 욕을 더 심하게 한다"며 "이제는 워낙 자주 들어 익숙하다"고 했다.
한 여대생이 청소 아줌마에게 욕설을 퍼부은 이른바 '경희대 패륜녀' 사건이 인터넷을 들썩였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번 사건이 여대생 개인의 문제라기보다 현 시대의 구조적 문제가 표출된 것으로 여기고 있다. 특히 요즘 청소년들은 어렸을 때부터 욕을 쉽사리 내뱉으면서 '욕하는 문화'에 너무 익숙해져 있다는 우려를 낳고 있다.
◆초등학교 전교 1등도 욕설
북구 침산동의 한 문구점. 이곳은 인근에 중학교와 초등학교가 있어 초'중학생들이 자주 들르는 곳이다. 문구점 주인에게 청소년들이 욕하는 실태를 묻자 "해도 해도 너무 심하다"고 했다. 평소 대화에 욕설을 너무 써 욕이 사실상 일상화됐다며 걱정하고 있었다. "과거에는 학교에서 '논다'는 아이들만 욕을 했잖아요. 하지만 이제는 모범생들까지 욕을 대수롭지 않게 써요. 말할 때 앞부분에 씨X, 존X 등이 기본적으로 들어가죠. 욕을 하나의 감탄사 정도로 생각해요. 해가 갈수록 욕하는 빈도나 정도가 심해지는 것 같은데 어떻게 손을 써볼 수 없는 지경이라 걱정이에요." 주인은 얼마 전에 전교 1등 하는 아이까지도 친구들에게 서슴없이 욕을 하는 모습을 보며 적잖게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달서구 A초교 김모(43) 교사는 요즘 아이들은 학교에서도 욕하는 문화가 심각한 수준이라고 했다. 김 교사는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 체육시간에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욕이 입에 붙은 것 같아 기가 막할 때가 많다"며 "꾸중을 해 보지만 잠시뿐"이라고 말했다. 더 큰 문제는 학생회장 등 학교 안팎에서 리더인 학생들 사이에까지 욕설 문화가 팽배한데다 남학생보다 여학생들이 욕하는 데 더 익숙해져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욕하는 문화의 전파력이 과거보다 더 빠르다는 분석이다.
수성구 지산동에서 공부방을 하는 박모(39'여)씨는 최근 가르치는 초교 6학년 아이들 가운데 가장 점잖고 성적도 우수한 남학생 입에서 느닷없이 욕설이 나와 깜짝 놀랐다. 박씨는 "왜 그리 욕을 쓰느냐고 물었더니 상대방이 듣기 싫은 말로 건드리는데 온순하게 대하면 아이들이 얕보고 더 괴롭히거나 왕따를 시키기 때문이라고 했다"며 "방어적 차원에서 욕을 써야 한다는 현실이 너무나 안타깝다"고 말했다.
초교생들의 욕하는 문화는 고학년에서 심하지만 저학년들도 욕을 어렵지 않게 접하면서 점차 욕을 하는 연령대가 낮아지는 추세다. A초교의 4학년 한 학생은 "한 반에 70, 80% 정도는 서로 이야기를 나눌 때 욕을 사용한다"고 말했다.
B고교 김모(39) 교사도 "요즘 학생들이 흔히 쓰는 말은 대개 지X로 시작해 나중에는 십원짜리 욕설이 거침없이 들어가는데 자신들만의 표현이 담겨 무슨 뜻인지 알아듣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며 "예를 들어 처음에는 학생들이 'ㅇㅅㅂ'이라며 자음만 이야기하면서 분위기를 보다가 점차 노골적이고 거친 욕을 하게 된다"고 했다. 김 교사는 "아이들이 욕을 하면서 나쁘다는 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게 더 심각하다"고 했다.
욕하는 문화에 익숙해진 아이들은 학교폭력에도 둔감해지는 경향을 보인다. 서재초교 최성보 교사(교육학 박사)는 "욕설은 약자를 누르려는 힘의 논리에서 발생하며 폭력의 전 단계이기 때문에 계속 내버려둘 경우 학교폭력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또 초등학교 때 욕하는 문화에 익숙해지면 나이가 들어서도 쉽사리 없어지지 않는다. 중'고교에 진학하면서 더욱 노골적으로 발전하고 익숙해져 대학생이 되고 성인이 됐을 때는 자제하기 힘든 지경에 이를 수 있다. 경희대 패륜녀 사건처럼 조금만 화가 나고 자제력을 잃어도 거친 욕설이 서슴없이 나오는 것이다.
◆왜 욕에 익숙해졌나
청소년들이 이처럼 욕하는 문화에 노출된 원인은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다. 전문가들은 대체로 인터넷을 가장 먼저 꼽는다. 청소년들이 욕설을 접하는 시기는 보통 초등학교 저학년 때다. 이 시기에 컴퓨터 게임을 많이 하는데 게임에서 진 상대방이 퍼붓는 욕설을 뜻도 모르고 접하다 보니 자신도 그런 욕설을 쓰는 데 익숙해진다는 것. 이는 인터넷 댓글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욕설이나 비난성 댓글을 붙이는 누리꾼의 상당수가 초등학생 등 청소년이라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인터넷에서 배운 욕을 친구들에게 사용하고, 인터넷을 통해 점점 더 심한 욕을 배우는 악순환이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다.
최 교사는 "가정에서 소외된 아이들이 게임을 접하면서 욕을 배우거나 영화, 오락 프로그램 등을 통해 욕을 알게 된다"고 했다. 부모로부터 욕을 배우는 아이도 적잖다. 이렇게 배운 욕은 학교에서 흔하게 사용되고 그 과정에서 엄청나게 빨리 번져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욕을 사용하게 된다.
최 교사는 "욕은 아이들에게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또래 사이의 공감대 형성과 스트레스 해소 수단으로 여겨지고, 일종의 자신감 표출로도 인식되고 있다"고 했다. 학생들은 욕을 하나의 권력으로도 생각한다. 욕을 사용함으로써 상대방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려는 것이다. 욕을 쓰지 않으면 나약하게 비친다는 의식도 팽배해 있다. C중 정모(16)양은 "말을 하다 욕을 중간에 섞으면 왠지 말주변이 있어 보이고 상대방에게 꿀리지 않는다는 느낌이 든다"며 "부모님이나 선생님께 말할 때는 욕을 사용하지 않는데 그러려면 뭔가 답답하다"고 말했다.
영남대 사회학과 허창덕 교수는 "맞벌이 부부 급증 등으로 인해 가정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것도 중요한 요인"이라며 "가정에서 인성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성인이 돼도 언어 습관을 고치지 못해 궁극적으로 사회생활이나 대인관계에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허 교수는 "가정과 학교, 사회가 청소년들의 언어 사용 실태에 깊은 관심을 갖고 대대적인 순화 캠페인을 실시하는 등 적극적인 대처가 시급하다"고 말했다.
전창훈기자 apolonj@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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