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직된 근원적 풍경의 멜랑콜리
부분과 전체가 유기적으로 통일되어 있는 그림과 그렇지 않은 그림이 있다. 전자가 상징하는 내용은 잘 이해할 수 있고 그것을 '총체성의 거짓된 가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렇지 않은 그림은 삶의 현실로부터 끄집어 낸 요소들을 고립시켜 그 파편들을 다시 조합한다. 이렇게 설정된 의미는 그 파편의 상이 본래 가지고 있던 의미의 연관 관계와 상관없이 작동하게 되는데 이런 그림을 알레고리적이라고 한다.
정병국의 어떤 그림은 화면의 상 자체만으로 볼 때는 그 중간쯤 돼 보인다. 사람은 길 위에 있으며 바다는 보일만한 적당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고 옆 사람과는 어느 정도 겹치지 않는 간격을 유지하고 있어 비록 과감한 생략이 있지만 모든 질서가 합리적인 관계에 놓아진 전체적인 통일성을 갖춘 것처럼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식에서 수용되지 않는 불편함의 연막이 드리워져 있다. 시각에 만족을 주려는 그림도 아니지만 어딘가 낯설고 파악되지 않는 거리가 느껴진다. 위험스럽고 긴장을 늦출 수 없게 하는 데가 있고 감추어진 의미가 드러나든지 일어날 것 같은 기대를 저버리게 하지 않는다.
그림의 내용이 읽어내기 쉽지 않다는 것은 알레고리적인 현대 예술이 지닌 논리적 난관이지만, 그래도 이 작가의 그림은 시각적인 느낌이 더 우선하는 편이다. 복잡한 의미연관 보다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이미지에 도전한다. 백지의 무언 상태처럼 표현할 수 없는 표현이 아니라 어떻든 이미지로 포획해 내려고 시도하고 인상적이고 강렬하게 그려낸다는 점에서 대단한 힘을 지닌 작가다.
색채를 보면 우울한 사색에 젖어들게 하는 회색조와 푸른 청색이 주조를 이룬다. 꽃들을 묘사할 때도 마찬가지다. 밝고 행복한 현실의 꽃이 아니라 감정의 좀 더 깊은 데서 길어 올린 색으로 울림을 주어 예스러운 신비감을 준다. 인물의 표정은 숨기거나 잘 드러내지 않는다. 알레고리 속에서는 역사의 죽은 얼굴이 경직된 근원적 풍경으로 나타난다고 하는데,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 현재를 투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기억한다는 것은 과거를 돌아보는 것인데, 미래가 아닌 그 꿈은 부질없고 자신의 정서를 끝없이 왜곡하는 것은 아닌지 두려울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좀 더 치열하게 그 심연의 바닥까지 들어가 볼 수는 없을까도 생각해보지만 보통사람들에겐 불가능한 일이며 또 일상이 거기까지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예술에 기대하는데, 예술가가 노획해 우리 앞에 가져온 그 이미지를 보고서야 비로소 자신의 내면에서 발견한 듯 아연해 한다. 특히 몽환적 이미지를 찾는 작가에게서 더욱 그런 기대를 하게 된다. (ydk81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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