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대전전추 패배 설욕 다짐에도 공산군 기습공격에 곤욕
1950년 8월 6일 새벽.
북한 공산군의 8월 공세가 마침내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제4돌격사단을 선봉으로 2·9·10사단과 107탱크연대를 투입시킨 낙동강 하류 남안(南岸)의 도하작전이 일제히 전개된 것이다. 경북 고령군 우곡면 포리에서 경남 의령군 지정면 봉곡리에 이르는 공격 대형을 이룬 낙동강 대회전이 서전을 장식하면서 창녕 영산을 치고 밀양을 거쳐 부산으로 진격하는 총공격의 시발점에 서 있었다.
그러나 낙동강 교두보 전 전선에 걸쳐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는 미 지상군은 처음부터 엄청난 화력으로 공산군에 출혈을 강요했다. 낙동강 북방에서 전선 정비를 하며 철수 중인 한국군을 제외하고 미 지상군이 공산군과 맞붙기는 천안·조치원 등 금강선(線)과 대전에서의 패배 이후 처음이었다. 그래서 미 지상군은 되로 받은 패배를 말로 갚겠다며 설욕전을 다짐하고 있었다.
특히 전력을 재정비한 미 제24·25사단은 경북 달성군 현풍·구지 방면과 경남 창녕군 영산·남지 방면의 평야지대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유리한 능선에 포진해 155·150·122㎜ 중포를 집중배치하고 주도면밀한 화망 구성으로 응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이 같은 미 지상군의 전력을 무시한 공산군 제4돌격사단의 주력 16연대가 합천에서 기동하여 의령군 봉곡·두곡리에서 야음을 타고 나룻배로 낙동강을 도하한 뒤 창녕으로 돌진해 왔다.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낙동강 상공에 붉은 빛깔과 노란 빛깔의 조명탄을 유성처럼 쏘아 올리며 창녕 남쪽 오항(烏項)으로 기습 도하에 성공한 공산군 16연대는 이른바 '낙동강 돌출부'로 진공로를 터 맹렬한 공세에 돌입했다. '낙동강 돌출부'란 창녕군 영산면 서쪽으로 돌출한 낙동강 연안지역으로 거창·합천·창녕으로부터 영산을 거쳐 부산 인근인 밀양과 삼랑진으로 이어지는 전략적 요충지대를 말한다.
만일의 경우 미 지상군이 이 '낙동강 돌출부'를 잃게 된다면 대구 서남방 현풍의 낙동강 주변과 밀양을 거쳐 임시 수도 부산이 크게 위협받게 될 것이고 공산군은 김일성 최고사령관이 호언장담했던 대로 광복 5주년이 되는 8월 15일까지 부산을 점령하는 데 유리한 거점을 확보할 수 있다. 이 때문에 피아간에 사생결단하고 한 치도 물러설 수 없는 최후의 공방전을 벌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낙동강 동쪽 창녕에 포진한 미 제24사단은 공교롭게도 대전에서 패퇴의 쓰라린 악연을 가졌던 공산군 제4돌격사단과 낙동강 전선에서 또다시 맞붙게 되었다. 대전 철수 당시 사단장 윌리엄 F. 딘 소장까지 실종(후일 공산군에 생포)되고만 미 24사단으로서는 지휘관을 잃은 울분으로 절치부심하고 있었다. 대전에서 당한 참패를 설욕할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 제24사단의 병력은 한국전쟁 개전 초기부터 막대한 손실을 입은 채 제대로 보충을 받지 못해 전력상 절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놓여 있었다. 이 때문에 사단 작전지휘부에서는 기동방어전략을 세우고 공산군 주력부대의 주 공격로로 판단되는 창녕 정면에 예하 21연대, 영산 정면에는 34연대를 전진 배치했다.
그리고 제19연대를 사단본부 주변인 창녕읍내에 포진케 했다. 이들 전투 부대들도 개전 초기에 한국 전선에 투입되자마자 각각 천안과 조치원, 대전 등지서 공산군 4사단과 105탱크사단에 쓰라린 패배를 당했었다. 그런 악연에서 벗어나려고 단단히 벼르고 있는데 미 34연대가 방어하고 있던 오항에서 또다시 불길한 징조가 나타나고 있었다.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낙동강을 도하한 공산군은 오항 인근 고지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던 34연대의 최전방 3대대 본부에 기습공격을 감행해 왔다. 종이호랑이 34연대가 천안에 이어 다시 한 번 교활한 공산군의 기습전략에 우롱당하는 순간이었다. 날이 밝아올 무렵까지 반격에 나섰던 1대대마저 적의 맹렬한 공격으로 사상자만 내고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적의 도하 지점을 창녕 오항이 아닌 의령 박진 나루터로 잘못 판단하고 방어 작전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적정에 대해 또 하나의 오판을 저지르고 만 것이다. 미 지상군이 포진하고 있는 낙동강 돌출부의 영산 방면 클로버 리프와 대봉리에서도 도하작전을 완료한 적의 주력 16연대와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져 하루에도 몇 번씩 주인이 바뀌는 혼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피란민을 가장한 공산 게릴라들이 미 24사단과 25사단의 유일한 연락 통로이던 남지교를 습격, 보급선을 차단하는 바람에 미 지상군은 파국적 위기에 몰리고 만다.
낙동강 하류의 급박한 상황에 휘말린 미 8군사령부에서는 마침내 전략적 요충지인 낙동강 돌출부의 영산~밀양선(線)을 사수하기 위해 미 해병 제3여단의 투입을 결정하기에 이른다. 미 해병대는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승선(乘船)대기 중이었으나 낙동강 교두보가 워낙 위험한 상황에 처해 우선 다급한 대로 투입된 것이다. 대전에 이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전전긍긍하던 비운의 미 제24사단은 해병대가 증원되자 비로소 숨통이 트여 전투태세를 재정비할 수 있었다.
이용우(언론인·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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