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원태의 시와 함께] 오늘 전화선으로 어떤 여자 몸을 던져오네 / 박재열

입력 2010-05-27 07:57:37

오늘 전화선으로 어떤 여자 몸을 던져오네

오늘 전화선으로 뜨건 뙤약볕, 몸을 던져오네

그 여자 내 책상 위에 벌렁 드러눕네

그 여자 뜨건 모래밭에 내가 걷지 못하네

꽉 조이는 바다가 넘어오네

그 여자 몸은 깔때기, 깊은 우물 하나 보여주네

막 싹트는 느티나무, 청바지의 깊은 우물이 출렁출렁하네

벌렁 누운 여자, 누워서 모든 것을 쏟지 않고 깔때기에 따르네

천둥과 벼락, 살찐 운명이 끼루룩 끼루룩 구멍 속으로 사라지네

다리를 꼰 지형(地形)은 외설스럽네

구멍은 또 심한 공복을 느끼네

고갱 고흐 형제도 지렁이처럼 꼬루륵 구멍에 빠져 절명하네

그 여자 깔때기 밖으로 뼈 녹은 젖을 흘려보내네

뜨겁고 두툼한 젖에 내 책들이 무너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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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선을 통해서라지만 참 대단한 유혹입니다. 아니, 요즘은 전화선이 아니라 무선으로, 그러니까 공기를 통해 "몸을 던져오는" "어떤 여자"들로 가득합니다. "오빠, 나 한가해!"라는 스팸메시지는 차라리 애교에 가깝습니다. 온갖 상업성, 음란성 광고들의 유혹이 "몸을 던져오는" 여자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진 않을 테지요.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지만, 그야말로 허공까지 그런 도저한 유혹으로 가득찬 시대가 '오늘'입니다. 마치 변기의 허구렁 구멍 같은 '욕망'이라는 "깔때기" 혹은 "깊은 우물" 속으로, "고갱 고흐 형제는" 물론, "천둥과 벼락, 살찐 운명"까지 "끼루룩 끼루룩" 빨려 들면서도, "심한 공복"에 시달려야하는 게 바로 '오늘'입니다. "뜨겁고 두툼한 젖에" 시인의 "책들"까지 무너지는 언어도단(言語道斷)의 지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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