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길치'의 변

입력 2010-05-25 07:54:36

나는 지독한 '길치'이다. 운전을 하게 된 이후로 그것을 절감하고 있다. 방향을 몇 번 바꾸고 나면 동서남북이 삼삼해지며 돌아갈 일이 걱정된다. 그래서 비록 시간이 더 걸릴지라도 큰길, 직각으로 꺾어지는 길로 다닌다. 예각이나 둔각의 길은 피한다.

길치의 유래 또한 멀다. 길을 잃기에는 제법 나이가 든 초등학생 시절에 숨바꼭질을 하다가 길을 잃어버린 적도 있다. 숨바꼭질이라는 게 숨는 이와 찾는 이의 무언의 경계가 있는 법인데 조금씩 멀리 달아나다 그만 낯선 골목에 갇힌 것이다. 겨우 길을 찾아 익숙한 골목 안으로 들어서며 느꼈던 안온함이 기억난다.

하지만 이러한 오래된 길치에게도 기쁨은 있다. 원치 않은 곳에서 뜻밖의 풍경을 만나는 기쁨이다. 근자에 집에서 멀지 않은 식당에 갔다가 길을 잃고 말았다. 이유는 단 하나, 주차장 입구와 출구가 달랐다는 것뿐이다. 더욱 헷갈릴 것이 염려되어 직각과 큰길로만 가다 보니 도시의 불빛이 끊기고 옆으로 논밭만 나왔다. 컴컴한 밤에 잔뜩 긴장한 채 표지판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한참을 갔다. 무척이나 깜깜한 하늘, 뜬금없는 콘크리트 건물, 낮은 기와집, 요철이 크게 느껴지는 오래된 도로, 모든 게 낯설었다.

길을 잃었음을 알아차리는 순간부터 모든 풍경이 낱낱으로 다가왔다. 두려움에 떨며 바라보는 풍경은 마치 잡지 속 사진처럼 오로지 풍경으로만 다가왔다. 낯섦과 아름다움이 묘하게 혼합되었다. 길을 잃은 나 자신이 유독 도드라지며 나 역시 풍경 속의 한 인물이 되었다. 한낮에 길을 걷다 우왕좌왕해도 마찬가지였다. 낯선 골목, 낯선 집, 낯선 담 위로 핀 낯선 넝쿨 장미. 낯선 아름다움 속에서 나 자신도 덩달아 낯설게, 그래서 처음처럼 다가왔다.

황지우는 '길'이라는 시에서 삶을 '거품 같은 길이여'라 노래했다. 그렇긴 하지만 우리는 자신이 그어놓은 길을 잃어 헤맬 때가 많다. 사표를 낼 수도 있고 휴직을 할 수도 있다. 생각해본 적이 없던 곳으로 거처를 옮기거나 남은 생을 병원에서 보낼 수도 있다. 그런데, 혹은 그래서, 길을 잃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만날 수 없었던 풍경, 특히 사람을 만나게 된다. 길을 잃었을 때 만나게 되는 이들은 이전 길을 돌아보게 하고 이후의 길에 대한 영감을 준다. 더 너그러워진 가슴으로 다른 길로 올라가게 할 수 있다.

삶에는 많은 샛길들이 장난스러운 눈빛을 하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이어지지 않은 길은 길이 아닐 것이니 결국 집으로 돌아갈 조금 다른 길이 있을 것이다. 거품 같은 길일지라도, 길을 잃어야 새로운 풍경을 만난다.

추 선 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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