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치백년] 수성들판 걷고 또 걸으며 '빼앗긴 들에도…' 울분

입력 2010-05-24 07:04:52

지역에 남은 상화의 발자취

영남지역은 우뚝한 준봉이 많았다. 그래서 그 산 언저리와 강가에 터를 잡고 살아온 영남인의 기질을 태산교악(泰山喬嶽)이라 했다. 크고 높고 험한 산을 보는 듯 웅장하고 때로는 거칠고도 가파른 기개가 느껴진다는 뜻이다.

영남인의 기질을 대변하는 또 다른 표현으로 설중고송(雪中孤松), 추상열일(秋霜烈日) 등의 말도 있다. 설중고송은 눈을 잔뜩 이고 있는 소나무처럼 건드리지 않으면 아무런 탈이 없고 절개마저 느껴진다는 뜻을 담고 있고, 추상열일은 가을 서리와 여름의 따가운 햇살처럼 지조와 위력이 엄정하게 내포된 모습을 가리킨다.

대구 경북 출신 민족 문학인으로는 이상화, 현진건, 이육사, 백기만, 이병철 등을 손꼽는다. 고월 이장희의 시세계가 담고 있는 절박한 우울과 애수 속에 갈무리된 보석처럼 맑고 서늘한 정신도 빠뜨릴 수 없다.

1930년대 초반 경북 김천에서 발간되었던 동인지 '무명탄'의 결연했던 변혁 의지와 패기를 어찌 건너뛰고 지나갈 수 있으리. 그 동인지에 참가한 청년 문학인들은 당시 명망 높은 인기 문학인들의 위선적 태도와 허위의식을 불만스럽게 지켜보며 청년세대들의 결속을 전국적으로 호소했다. 신진 문학도들에 의해 제기된 매서운 문단개혁론이었다. 그들은 부패한 식민지 문단의 낡은 제도와 관습을 척결하고 극복하려는 뜻을 가졌다.

대구시 달성군 월배면(지금의 달서구 월배) 산 언저리에는 월성이씨 가묘가 조성돼 있는데 바로 이상화 시인의 가족 묘역이 있다. 독립투사였던 이상정 장군, 민족시인 이상화, 사회학자 이상백, 수렵가 이상오 등 상화 시인의 우뚝한 형제들은 유택(幽宅)에서도 다정하게 누워있다.

대구는 아직도 이상화 시인의 발자취가 곳곳에 남아 있다. 달성공원의 상화시비, 두류공원의 상화시비와 동상, 계산동의 상화 고택, 상화 시인이 재직했던 교남학교(현 대륜중고등학교), 상화시인이 뜻있는 친구들과 비분강개한 대화를 자주 나눴던 옛 조양회관 건물, 민족의 절창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쓰기 위해 한없이 걷고 또 거닐었던 수성들판 등이다.

우리가 찾아서 몸으로 가슴으로 직접 느껴볼 수 있는 유적지보다도 훨씬 크고 소중한 것이 바로 상화 시인의 숨결과 시정신이다.

이동순 영남대학교 국문과 교수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