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미술 산책] 이쾌대 作 상황

입력 2010-05-22 07:00:10

신부가 발로 찬 사발, 식민지의 고통인가

작가 : 이쾌대 제목 : 상황 재료 : 캔버스에 유채 크기 : 130×160㎝ 연도 : 1938년 2월 소장 : 개인 소장
작가 : 이쾌대 제목 : 상황 재료 : 캔버스에 유채 크기 : 130×160㎝ 연도 : 1938년 2월 소장 : 개인 소장

'군상'시리즈에서 받은 압도적인 인상이 너무 강렬한 나머지 이쾌대의 예술세계를 생각할 때 자칫 간과하기 쉬운 것이 있다. 그의 초반 작품들에서 볼 수 있는 섬세한 채색과 우아한 소묘의 매력을 결코 지나칠 수 없는데, 바로 그 그림들에 도입된 은유의 미스터리와 고색창연한 색감에서 풍기는 뉘앙스가 그의 작품세계를 한층 다채롭게 한다. 상징적인 주제의 우의와 의고적인 채색과 선적인 기법에서 나오는, 우수를 자극하는 미적 특징들은 대개 자연주의나 표현주의 또는 형식주의 추상화에 머문 우리 근대미술의 양식 편력 속에서는 단연 돋보일 수밖에 없는 요소다.

1937년 일본 유학이 끝나갈 즈음 주제적 표현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조선적인 형태를 찾아 고유 의상의 인물을 선택하고 식민지하에서 겪는 고통을 암시하는 알레고리적인 회화를 자주 그렸다. 이 작품 은 1938년 2월로 서명돼 있어 1937년 10월에 제작해 이듬해 초 녹포사전에 출품한 '무희의 휴식' 바로 직후에 그린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통렬한 비애를 표현한 '운명'은 그해 가을 이과전(二科展)에 첫 입선한 작품이다. 그러고 보면 다의적인 해석이 가능한 상징적 주제의 작품들이 모두 제국미술학교 졸업 무렵부터 귀국하기 전 일 년여 동안에 집중적으로 제작한 작품들이다.

이 짧은 기간에 이쾌대는 연속적인 주제의 발전을 보여주었다. '무희의 휴식'에서 소재적인 향토주의라고 볼 수밖에 없었던 모티프인 전통 복식의 인물설정을 작품 '상황'에서는 보다 복잡한 구성 속에 다시 등장시킨다. 주제의 탐구가 심화되면서 다음 작품 '운명'은 또 이 '상황'과 일련의 연속적인 관계에 있는 것인지 모른다. 파국에 이른 극의 줄거리 같은 것을 느끼게 하는 것이 단순히 전통에서 소재를 취할 뿐 아니라 나아가 이제는 분명한 현실의 알레고리를 창조하고 있다.

색채의 진전과 변화도 주목할 만하다. '무희의 휴식'에서처럼 원삼에 족두리를 한 신부의 채복과 노파가 안고 있는 패물의 묘사에서 더 많은 색채를 배려했다. 그러나 '운명'에 가면 이런 색감은 전반적으로 단색 톤으로 변하면서 선조의 기미가 더욱 두드러진다. 그 중간에 서울에서 재동경미술학생종합전이 열렸는데 거기에 낸 '습작'을 두고 김복진의 까다로운 안목도 "색채의 운율이 세련되어 있다"고 평했는데 당시 작품들의 미묘한 특징을 예리하게 지적한 것이다.

이 작품의 관건은 무엇보다 알레고리적 표현에 대한 해석에 있다. 이전의 한 작품에서 그는 동서의 갈등이 빚는 불균형을 유머러스하게 풍자한 적이 있는데, 뒤에 '운명'에서는 몰락의 길에 들어선 한 집안의 절망적 사정을 재현했다. 미래에 대한 불길한 예견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비극을 초래할 발단이 이 작품에서 표현되고 있는 듯하다. 작품 속 주인공은 혼례를 치를 신부의 차림을 하고 춤이라고는 보기 힘든 방어적인 동작을 취하고 있다. 마치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연극처럼 극적이다. 무희 같기도 한 그 여인의 버선 발길에 차여 엎질러진 사발과 깨진 채 흩어진 기물들은 각 인물들의 알 수 없는 표정들과 함께 불안과 긴장을 조성한다.

한 장면 속에 많은 은유를 압축하여 해석의 여지가 풍부한 알레고리를 만들고 있는 이것이 상징주의나 초현실주의적 요소를 잘 받아들이지 않았던 우리 근대미술에 없는 스타일이다. 당장은 풀기 힘든 도상학이 요청되고 있다.

김영동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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