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원태의 시와 함께] 달빛 / 이진흥

입력 2010-05-20 07:02:47

모두가 잠들고 창가

유리컵 속 찰랑거리는 어둠으로

당신은 온다, 애절하게

피뢰침에 찢긴 속살, 푸른 정맥이 몇 가닥

아파트 옥상에 걸리고 당신의

흰 목, 그늘의 일부가 흔들린다

깊은 밤 아무도 모르게 와서 물마시고

당신은 돌아선다 재빨리 나는

본다, 창가에 놓인 유리컵 가장자리

아, 지울 수 없는 투명한

슬픔 하나가 묻어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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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은 이제 '당신'으로 "애절하게" 온다. "모두가 잠들고 창가/ 유리컵 속 찰랑거리는 어둠으로" 오기에 당신은 그토록 애절할 수밖에…… "깊은 밤 아무도 모르게 와서 물마시고" 돌아서는 당신! 우리는 아쉽게도 이 연인 같은 달빛을 "재빨리" 해후할 수밖에 없다. 세속의 밤풍경이란, "피뢰침에 찢긴 속살, 푸른 정맥이 몇 가닥/ 아파트 옥상에 걸리"는 것일진대, 따라서 "당신의/ 흰 목, 그늘의 일부가 흔들린다"는 달빛 묘사는 그리하여 더욱 섬세하고 적실하다. 달빛은 그렇게 "아, 지울 수 없는 투명한/ 슬픔 하나가 묻어" 빛을 발한다! 이 풍진 세상의 아파트 거실 창가에도 아주 가끔씩, 달빛이 "아무도 모르게" 저 혼자 교교히 깔리는 적요한 밤이 더러 있다. 예민한 영혼들만이 그걸 아프게 바라보는 시대가 되었다. 달빛을 잃어버려 가는 시대라니!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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