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고도 잔잔한 매력…고개 끄덕이며 삼국유사를 걷다
글을 쓰기 전 두어 시간 헤맨다. 기자가 짧게는 하루, 길게는 1박2일 동안 디뎌본 땅은 엉킨 실타래처럼 기억 속에 남아있게 마련이다. 자칫 잘못 손을 댔다가는 기억과 흔적이 엉키고, 사실과 느낌이 설켜서 정말 뒤죽박죽이 되고 만다. 이 때문에 길을 내닫은 시간만큼 기억을 되짚어내는 시간이 필요하다. 숱한 고민 끝에, 대개 그 땅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 느낌으로 글을 시작한다.
하지만 경주는 달랐다. 너무 뻔한 수식어여서 지루함마저 주는 '천년 고도'. 골골마다 스며있는 숱한 이야기 보따리를 어떻게 풀어낼까 고민하던 중에 이재호씨를 만났다. 조금은 어눌한 말투지만 환한 웃음을 보고 있노라면 오래 전부터 알던 친구를 만난 느낌마저 전하는 사람. 경남 의령에서 태어난 그가 경주로 옮겨 온 것은 16년 전. 1987년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초대 총무를 맡으면서 전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했던 인물이며, '천년 고도를 걷는 즐거움'과 '삼국유사를 걷는 즐거움'이라는 문화기행 책을 쓴 인물이다.
그가 운영하는 한옥 펜션인 '수오재'(守吾齋)에서 처음 만났을 때, 마음 급한 기자는 아랑곳않고 "밥이나 먹고 갑시다"라며 유유자적을 몸소 실천해 보였다. 점심 차리는데 30분, 밥 먹으며 막걸리 한 잔까지 반주삼아 걸치고 나니 오후 2시를 훌쩍 넘겼다. 고작 한 잔뿐이지만 정신까지 텁텁해지면서 덩달아 유유자적해졌다. 수오재는 기와집 네 채로 이뤄져 있다. 전국 각지의 쓰러져가는 한옥을 해체해서 다시 복원한 것. 가장 최근에 지은 집은 전북 김제 땅의 내로라하는 부잣집 사랑채를 옮겨온 것이다. 툇마루에 앉아 이야기를 듣는데 뒤켠 대숲에서 불어오는 봄바람이 빨리 나서자고 재촉한다. 눈치를 챈 주인장이 "동네 한 바퀴나 돌아보자"며 기지개를 켰다.
진평왕릉'선덕여왕릉의 소박한 美
수오재를 나와 오른편으로 야트막한 동네 언덕을 넘어서니 너른 잔디가 펼쳐진 왕릉이 반갑게 맞는다. 이재호씨는 "당초 경주에 터를 잡을 때 어느 곳이 좋을까 고민했는데, 바로 이 효공왕릉이 나를 꼬셨다"고 했다. 왕릉이 곁에 있으니 영원히 개발되지 않을 것이고, 입장료도 받지 않아 언제든 갈 수 있는 나만의 뒷뜰을 가질 수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는 것이다. 처용가가 지어진 시기인 신라 49대 헌강왕의 아들이며, 신라 마지막 여왕인 진성여왕의 친정 조카인 신라 52대 효공왕(김요). 16년 재위 기간 동안 후백제와 후고구려가 신라 영토를 잠식해 들어왔지만 이를 평정하지 못하고 숨을 거둔 탓일까. 왕릉이라기엔 아무런 장식도 없이 쓸쓸한 느낌마저 준다.
효공왕릉 옆 대숲을 빠져나오면 너른 들판을 만난다. 바로 앞에는 유명한 경주 낭산(狼山)이 길게 누워있다. 낭산 쪽으로 들판을 가로지르다 보면 왼쪽으로 동해남부선 철길과 울산으로 이어지는 7번 국도 사이에 신문왕릉도 있다. 들판에는 모내기 준비가 한창이다. 논두렁에는 온갖 봄꽃이 만발했고, 논물에 반짝이는 봄 햇살은 아련한 추억에 잠기게 한다. 유난히 구불구불한 논둑이 낯설게만 보인다. 경지정리를 하지 않아서다. 땅만 파면 유물이 쏟아지는 유적지이다보니 함부로 길을 내고 구획을 나누지 못해서라고 한다.
경주 시가지 동남쪽에 자리 잡은 낭산은 서라벌 시절부터 신성한 산으로 여겨지던 곳. 신령이 내려와 노니던 곳으로 여겨 나무도 베지 못하게 했다. 거문고의 명인 백결 선생이 살았고, 대문장가 최치원이 공부하던 독서당이 있으며, 남쪽 능선에는 선덕여왕릉, 동북쪽에는 황복사터와 삼층석탑, 서쪽 중턱에는 낭산 마애삼존불이 있다고 안내판은 전하고 있다. 야트막한 산길을 오르면 '선덕여왕릉'을 알리는 표지판이 나오고 사람들의 발길로 닳아버린 솔숲길이 나온다. 예전에는 찾는 이가 드물던 한적한 능이었지만 드라마 때문에 주말이면 북새통을 이룬다고 한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권 경주편에는 56명의 신라 왕 중 유일하게 진평왕과 선덕여왕에 대한 이야기만 나온다. 두 왕릉에 대한 그의 표현을 빌어보자. '경주에 있는 155개 고분 중에서 왕릉으로서의 위용을 잃지 않으면서도 소담하고 온화한 느낌을 주는 고분은 진평왕릉뿐이다. 그 밖에 또 있다면 낭산 꼭대기에 있는 그의 딸 선덕여왕릉이 비슷한 인상이다.'
맞는 말이다. 화려하고 웅장한, 그래서 보는 이의 기를 죽이는 왕릉이 아니라 품격있는 고졸한 느낌의 왕릉. 이는 두 왕의 삶과도 무관하지 않다. 진평왕은 드라마에서 비춰지는 무력하고 우유부단함과는 전혀 달랐다. 무려 52년간 왕위에 있으며 삼국 통일의 기반을 닦았고, 군사를 이끌고 전장을 누볐으며, 여왕의 탄생까지 가능케 했던 인물. 그의 따님 선덕여왕도 신라 문화의 꽃을 피웠다. 유홍준은 '황룡사 구층탑, 분황사, 첨성대, 삼화령 애기부터, 남산 불곡의 감실부처님 등은 모두가 선덕여왕 시절의 유물이다. 경주에 있는 왕릉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 시기 소산인 셈이다'라고 적고 있다. '삼국사기' 등 후대의 역사적 평가에서 푸대접을 받은 두 부녀는 직선거리로 1.5km를 사이에 누고 땅 속에 묻혀있다. 뒤늦게 드라마에서 되살아났지만 그마저도 왜곡된 모습으로 기억되게 생겼다.
낭산을 내려서서 마을을 지나 들판을 오른쪽에 끼고 잠시 걸으면 국보 제37호 '경주 구황리 삼층석탑'이 나온다. 1943년 탑을 수리할 때 순금으로 만든 여래좌상(국보 제79호), 여래입상(국보 제80호)이 나왔다. 탑을 옆에 두고 들판을 바라보면 그곳을 가로질러 진평왕릉으로 향하는 구불구불한 길이 보인다.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그 길을 따라 봄 햇볕을 맞으며 거니노라면 천년의 아득한 세월이 손에 잡힐 듯 다가선다. 이재호씨는 "한때 이곳은 '다운타운'이었다"고 했다. 지금은 온통 논 밖에 없는 이곳이 도심지였다니.
논두렁 돌까지도 신라대 주춧돌
비록 화려할 것은 없지만 진평왕릉은 아름드리 나무와 함께 어우러져 그대로 한 폭의 풍경화로 각인된다. 진평왕릉 앞에 펼쳐진 들판을 바라보면 선덕왕릉이 자리 잡은 낭산과 수오재가 자리한 마을이 손에 잡힐 듯 다가선다. 이재호씨가 말하는 '동네 한 바퀴'가 그제서야 무슨 뜻인지 알게 된다. 거리는 5km 남짓. 세 왕릉을 지나서 들판을 가로지르면 동네를 한 바퀴 도는 셈. 왕릉 답사가 끝났으니 이제 볼거리도 없겠다고 생각했는데 천만의 말씀이었다. 신라 천년의 역사 찾기는 들판 한가운데서 제대로 시작할 수 있다.
경주 보문동 연화문 당간지주를 시작으로 보문리 석조(돌로 만든 욕조), 보문리 사지(절터)까지. 이곳을 지날 때면 눈을 크게 떠야 한다. 논두렁에 박혀있는 돌은 그냥 돌이 아니라 얼추 1천500년 전 이곳에 번창했던 집과 절의 주춧돌이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논농사를 지을 때면 접근도 못하던 곳. 경주시가 최근 땅을 사들여서 탐방로를 만든 덕분에 샅샅이 살펴볼 수 있게 됐다. 이 땅을 지날 때면 새삼 전 국토가 박물관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제자리를 잃고 아무렇게나 방치된 천년의 돌들에는 덧없는 세월이 새겨있다.
쉬엄쉬엄 걸어도 3시간 남짓. 다시 수오재로 찾아든다. 경부고속도로 경주나들목를 빠져나온 뒤 7번 국도(문무로)를 따라 우회전한 뒤 1.6km쯤 가면 신문왕릉 바로 옆에 왼쪽 마을로 접어드는 길이 나온다. 그 마을 안쪽에 수오재가 자리 잡고 있다.
글·사진=김수용기자 ksy@msnet.co.kr
도움말=기행작가 이재호 054)748-1310
전시장소 협찬=대백프라자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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