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작가 노익배(91) 선생은 70년 넘게 사진을 찍었다. 사진 이야기를 들으려고 찾아갔는데, 선생은 지난해에 세상을 떠난 아내 이야기를 했다.
그에게 아내는 오직 그리움이고 슬픔이었다. 사람살이의 신산을 겪을 만큼 겪었을 사람이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주름진 눈가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고 애써 울음을 참는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21세 때 결혼했으니 70년을 함께 살아온 셈이다.
"일생 서로 위하며 살았어요. 할마이가 착해가지고, 아파도 내색도 안 하고, 병원에 갔을 때는 벌써 3깁디다."
유방암이었다고 했다.
옛날 사진을 보고 싶다는 기자의 부탁에 그는 아내와 결혼식 때 사진을 시작으로 자식들과 함께 찍은 가족사진을 많이 보여주었다. 아내는 서울 아현동의 같은 마을에 살던 세살 아래 규수로 결혼 전에도 알던 사이였다고 했다. 아내와 가장 최근에 함께 찍었던 사진(2009년 4월 11일)을 펴놓고는 또 말을 잇지 못했다.
'세상에 왔으니 가는 것인데…'라고 말하면서도 노 선생은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는 세상에 왔다가 떠나야 하는 사람살이의 이치를 긍정했다. 그러나 자신은 남고, 아내만 떠나버린 현실을 더없이 슬퍼했다. 70년 전 결혼식 때 찍은 사진을 펴놓고, 아내가 두 손으로 껴안듯이 들고 있는 백합꽃에 대해 오래 이야기했다. 당시만 해도 그 계절에 백합을 구하기는 어려웠다고 같은 말을 여러번 했다. 그는 백합꽃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게 아니라, 떠나고 없는 아내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했다.
선생은 10대 중반부터 카메라에 관심을 가졌다. 처음 카메라(후지 플렉스)를 장만한 것은 1942년 영등포 '소화 산소제조회사'에 근무하던 시절이었다. 징병이나 징용을 가지 않는 회사로 요즘으로 치면 '병역특례업체' 같은 곳이었다. 그러니 그 회사 취직은 행운이었다. 비교적 여가도 즐길 수 있는 회사였다. 그래서 틈만 나면 카메라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희멀겋게 나오거나 말거나 사진이 나온다는 게 기뻤다. 1944년 경성일보 독자 사진콘테스트에서 입선한 덕분에 사진에 대해 제법 아는 척도 했다.
노익배 선생은 사진이라면 모름지기 사람살이를 기록해야 한다고 했다. 스승이었던 구왕삼 선생의 지론이었는데 어느덧 자신의 사진철학이 됐다. 그는 1945년 해방된 다음 날인 8월 16일 자신이 근무하던 '소화 산소제조회사'의 국기 게양대에 일본기가 아닌 태극기가 걸렸을 때의 감격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한국인끼리 감격의 절을 올리던 장면을 사진에 담기도 했다. 그 덕분에 그날의 감격은 세월이 가도 변하지 않는다고 했다.
"요즘은 풍경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진은 사람살이를 담아야 합니다."
선생은 누드나 꽃, 풍경 사진을 찍는 풍토를 못마땅해했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사진에는 풍경 사진이 없었다. 몇장 있기는 했지만 이 역시 주인공인 사람을 찍기 위한 배경에 불과했다.
낚시를 좋아했던 그는 카메라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일기 쓰듯 사진을 찍었다. 낚시 잡지 '낚시춘추' 편집인으로 활동하면서 사진도 많이 게재했다. 낚시터뿐만 아니라 시장에서, 거리에서 '대상'이 눈에 띄는 순간 찍었다.
'약장수의 입담에 넋을 잃은 군중, 장죽을 문 노인들, 이른 아침 연탄재 담은 고무 대야를 머리에 이고 쓰레기수거 차 앞으로 몰려드는 주부들, 자전거를 들고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중년 남자, 학교를 파하고 구불구불 먼 길을 걸어 집으로 가는 아이들, 눈길 위로 무거운 짐을 실은 리어카를 끄는 여인, 손님을 기다리는 리어카꾼들….'
순간을 포착해야 했기에, 언제나 카메라를 들고 다녔고, 그랬기에 좋은 카메라를 고집하지 않았다.
"작품을 찍는 데 필요한 것은 좋은 카메라가 아니라 밝은 눈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포착할 것인지, 왜 포착해야 하는지를 아는 눈이 중요하지요."
그는 지금까지 그 좋다는 니콘 카메라를 가져본 적이 없다고 했다. 캐논과 미놀타를 썼고 삼각대 하나도 장만하지 않았다. 대상이 눈에 띄면 호주머니에 쑤셔 넣어두었던 카메라를 꺼내 즉석에서 스냅으로 찍었다. 작품이 좋다는 세간의 평가도 받았고 입상도 했다.
서울에서 태어나 1953년 대구로 온 그는 대구를 '제2의 고향'이라고 했다. 대구를 사랑했고 대구에 대한 자부심도 강했다. 서울이 한국의 수도라면, 대구는 사진의 수도라고 했다. 평생 찍어온 사진 중에 특히 마음에 드는 작품을 골라 최근에는 '노익배 사진집'을 냈다. 그리고 지인들에게 일일이 한권씩 우편으로 보냈다. 우편료만 110만원이 들었다고 했다. 70여년 사진 인생을 정리하는 과정이자 기록을 남기는 과정이었다.
"친하게 지내던 사우(寫友), 조우(釣友)들이 한 사람, 두 사람 떠났습니다. 평생 곁에서 온갖 궂은 일 마다 않고 뒷바라지 해주던 아내도 떠나고 없으니 나날이 슬프고 텅 빈 것 같습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는데, 김광석이 불렀던 노래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가 자꾸 생각났다.
'곱고 희던 그 손으로 넥타이를 매어주던 때, 어렴풋이 생각나오. 여보 그때를 기억하오. 세월은 그렇게 흘러 여기까지 왔는데-, 인생은 그렇게 흘러 황혼에 기우는데-. (중략) 다시 못 올 그 먼 길을 어찌 혼자 가려 하오. 여기 날 홀로 두고 여보 왜 한마디 말이 없소.'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사진:성일권 기자 sungig@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문재인 "정치탄압"…뇌물죄 수사검사 공수처에 고발
[전문] 한덕수, 대선 출마 "임기 3년으로 단축…개헌 완료 후 퇴임"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
野, '피고인 대통령 당선 시 재판 중지' 법 개정 추진
'어대명' 굳힐까, 발목 잡힐까…5월 1일 이재명 '운명의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