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화 미명 아래 '백의민족' 반만년 전통 빼앗기다
일제에 의한 강제 병합이 이루어진 1910년부터 1945년까지를 흔히 식민지 시기(일제강점기)라고 한다. 이 시기는 합리성을 근간으로 한 근대적 변화와 식민지적 상황에 따른 강제와 통제가 맞물린 복잡한 시기였다. 이 참담한 기간 동안 우리의 의생활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고, 그 변화는 무엇이었을까?
일제강점기 전인 19세기 말은 근대화 물결을 피할 수 없었고 이는 곧 의생활에 많은 변화를 주었다. 일제강점기 초기에는 자의적으로 또는 타의적으로 백의를 폐하고 색의(色衣)를 입게 하면서 의생활을 개선토록 한 것이었다면 후기는 일제의 강압적 통제에 의한 전시복장으로의 전환과 보급이었다.
1800년대 말, 근대화는 피할 수 없는 과제였다.
1876년 병자개항 이후,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의 일본 시찰과 영선사(領選使)의 청나라 시찰, 서양과의 외교 관계 성립 등으로 근대적인 의식이 일었다. 이어 갑신년(1884)과 갑오년(1894)에 관 주도의 의제(衣制) 개혁이 시작되었다.
◆ 단발령 이어 개화파들 양복 입기 시작
1895년 단발령이 공포되면서 곧이어 서구식 군복이 채택되었고 외교관 복장과 문관 복장이 차례로 양복 제도로 개혁됐다. 이 과정에서 적지 않은 신·구세력의 갈등과 반발, 대혼란이 있었다.
이와 함께 왕실과 개화파 인물들, 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남녀 인사들이 서서히 일상복으로 양복(여자는 양장)을 입기 시작했다. 최초로 양복을 입은 사람들은 개화파였는데 특히 몸맵시가 좋은 서광범이 양복을 입게 되면서 동료들 사이에 양복이 퍼졌고, 또한 윤치호는 1885년 1월에 미국으로 유학을 가면서 단발을 함에 따라 상투를 자른 조선 최초의 인물이 됐다.
지방의 경우는 이보다는 늦게 단발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1909년 11월, 안동의 한 '협동학교'에서는 교사들과 학생들이 단발을 하였는데, '황성신문'에서는 '협동진보'라는 제목을 붙여 협동학교의 단발에 대하여 높이 평가했다. 아울러 전통 유림들로부터 심한 비난을 받았다는 기사도 함께 실었다. 신·구 세력 간의 갈등을 잘 보여주는 사례였다.
여성의 경우 1899년 윤치호의 부인인 윤고려가 양장을 하고 귀국했다. 미인이었던 그녀는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고 있던'S자 스타일'의 드레스에 리본과 새 깃털 장식을 한 모자를 썼다고 한다. 지금으로 치면 굉장히 파격적인 옷차림인 셈이다. 엄비(嚴妃)나 배정자(裵貞子), 그리고 1900년 미국에서 돌아온 여의사 박에스터나 하란사(河蘭史) 등도 초기 양장 차림을 했던 신여성들로 알려져 있다.
◆ 결혼예복 신구 양식 섞이기 시작
결혼 예복에서는 시간이 흐를수록 신구 양식이 섞이기 시작했다. 1892년에 이화학당의 여학생과 배재학당의 남학생이 기독교식 신식 결혼식을 거행하였는데, 이때 신부는 면사포를 쓰고 신랑은 프록코트에 예모를 썼다.
또 1914년 대구YMCA에서 거행된 한 기독교 신자 결혼식의 경우 신랑은 모닝코트를 입고 예모를 썼고, 신부는 치마저고리에 꽃으로 장식한 면사포를 쓰고 부케를 들고 있었다.
1910년 8월 일제에 의해 강제 병합이 이뤄지자 나라를 되찾자는 애국심으로 한복이 애용되기 시작했다.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은 여학교의 여학생들과 전도 부인들이 한복 개량의 중심이었다. 치마는 활동에 편한 어깨허리가 달리게 되었고, 저고리는 길이가 길어졌다. 서울의 이화학당에서는 체육 시간에 여학생들에게 체조를 가르치면서 편리한 '어깨허리' 치마를 고안하였다. 전도 부인들은 활동에 편하도록 치마 길이를 줄여나갔고 점차 두 층, 세 층으로 접어 줄인 무릎길이의 짧은 치마가 유행했다.
대구의 여학생들도 이런 유행을 비켜갈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1930년 대구 제일교회 부설 대남유치원의 졸업 기념 사진을 보면 유치원생들이 상고머리에 긴 저고리, 접음 단 장식을 한 치마를 입고 있다. 당시 접음 단 장식의 짧은 치마가 여학생들 사이에 큰 유행이었다.
신식교육을 받은 여성을 중심으로 단발을 하고 긴 저고리에 짧은 통치마를 입는 신여성이 등장하였는데 그들을 지칭해 '단발미인', '모단(毛短) 걸', '모던 걸'이라는 신조어가 나오기도 했다.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면서도 이들의 차림은 차츰 안방 여성들에게 동경의 대상이 되었고 1930년대 후반에는 파마머리도 등장했다. 그러나 전파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았다. 실제로 1950년대까지도 파마머리는 적지않은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 흰옷 금지 색옷으로 전환 보급
일제는 꾸준하게 백의 금지의 대안으로 색의 입기를 권장했다. 세탁에 드는 시간과 노동력 낭비 등을 들어 백의에 대한 폐해를 지적하면서 염색 실습이나 강습회를 열어 색의를 입도록 강제한 것이다. 농촌진흥운동 지침에서도 생활 개선의 명목으로 색옷 입기를 장려하였는데 성과가 부진하자 장날 시장에서 온 이들을 대상으로 물감을 뿌리거나 시장 출입을 금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렇게 흰 옷을 비실용적이라는 이유로 강제로 입지 못하게 함으로써 흰 옷 착용이 줄어들게 되기는 하였지만 불만과 반발이 매우 커 백의는 한동안 일본에 대한 저항의 표현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여성의 장옷 폐지도 주장됐다. 1910년을 전후로 쓰개치마를 두르고 걸어가는 여학생의 소풍 행렬은 장안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었으나 1914년부터는 외출에 우산을 사용하도록 했다. 또한 일제는 장옷 대용으로 만민 평등을 상징하는 두루마기를 권장했다. 남자들의 두루마기는 색옷의 권장에 의해 검정 두루마기가 보편화되었으며 겨울용으로 모직 두루마기를 입는 것이 큰 호사였다.
복식의 서구화는 실용성 논리 외에 식민통치 논리의 개입으로 더욱 빠르게 수용되기 시작했다. 1930년대에는 일제의 강요에 의해 블라우스, 스웨터, 주름치마, 세일러복 등으로 이루어진 양장 교복이 등장했고 교육진흥운동으로 여성들의 신교육이 확대되면서 생활개선운동도 광범위하게 전개됐다. 당시 발간되었던 신문이나 잡지 등은 의생활에 관한 기사를 활발히 게재하면서 생활개선운동에 적극 관여, 새로운 유행이나 상품 가격에 대한 정보는 물론 의복의 세탁이나 염색, 관리법, 양재, 편물 등에 대한 정보를 주었다.
1937년에는 얼마 전 작고한 고 최경자 여사가 최초로 함흥양재학원을 세우기도 했다.
이은주 안동대학교 한국문화산업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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