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랑 산사람] 보성 오봉산

입력 2010-05-13 14:11:54

변화무쌍한 경치 품은 남도 명산

다섯 개의 봉우리를 거느렸다 하여 이름 붙은 오봉산(五峯山)은 전국적으로 수십 개에 이른다. 그 중 대표적인 곳을 꼽으라면 누구나 춘천 오봉산, 횡성 평창의 오봉산, 경남 양산의 오봉산, 함양의 오봉산을 들 것이다. 그러나 오늘 소개할 보성의 오봉산(392m)을 간과해선 안 된다. 앞에 열거한 산에 견주어도 밀리지 않는 내공을 자랑하기 때문이다. 보성 오봉산은 산과 바다가 인접해 있고 기암절벽과 화려한 주변 풍광이 압권이다. 옛날 등산로가 개발되지 않았을 때 '한국의 비경'이란 책에서 '인검암'(人劍岩)으로 소개된 적이 있었다. 10여년 전 처음 이 산이 대중에게 소개되었을 때 다들 입을 모아 칭찬했지만 코스가 짧다는 것이 약점으로 지적됐다. 그러나 근래 보성군이 등산로를 대대적으로 정비해 누구나 만족할 수 있는 전천후의 산으로 가꾸어 놓았다.

#빨치산-군경 전투 벌였던 역사현장

오봉산은 냉전의 아픔이 서려 있는 산이다. 1949년 10월초, 빨치산 보성지구부대는 보성경찰서를 습격하려다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경찰의 매복에 걸려들었다. 격전 끝에 100여명만이 겨우 군경 저지선을 뚫고 오봉산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뒤쫓아온 군인과 경찰들에게 다시 발각돼 격렬한 전투를 벌였고, 빨치산 잔당들은 30여명의 사상자를 낸 뒤에야 오봉산을 겨우 빠져나갈 수 있었다고 전한다.

산길 곳곳에 형성된 너덜지대엔 많은 돌들이 쌓여 있다. 이 돌들은 그 사연을 알고나 있을까. 다른 산의 너덜과는 모양새가 다르게 모두가 널찍하고 반듯반듯하다. 한때 가난한 시절에 이곳 주민들은 이 돌을 구들장으로 팔아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질 좋은 구들은 마을의 자랑이었지만 세월무상일까. 지금 그 돌들은 돌탑이 되어 오봉산을 찾는 등산객들에게 색다른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산의 입구인 해평저수지 용추교에 다가설 때까지도 오봉산은 그리 독특하지 못하다. 그저 평범한 동네 뒷산쯤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발걸음을 내디딜수록 깊은 매력에 빠져든다. 제법 규모를 갖춘 암릉의 배열은 신비스럽기 그지없다. 설악산 천불동계곡에 들어선 듯하고 웅장한 계곡은 가야동의 협곡을 보는 듯하다. 산등성이에 솟은 암봉과 암벽은 날카로운 칼날을 세워놓고 병풍을 펼쳐놓은 것 같다. 작은 산에 이토록 변화무쌍한 경치를 품을 수 있었을까 감탄할 정도다.

#득량만 방조대'다도해 풍경 한눈에

오전 11시. 오봉산 등산로의 사통팔달 기점인 용추교에서 내린다. 등산안내도를 보고 저수지 오름길 대신에 좌측 임도를 100여m 내려가면 우측으로 등산로 표지판이 보인다.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대나무 숲과 산죽터널을 통과해 30여분이면 주능선에 닿는다. 탁 트인 시야로 득량만 방조대와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다도해의 크고 작은 섬들이 눈앞에 펼쳐지고 이마에 흐른 땀은 시원한 해풍이 거둬간다.

매끈하면서도 힘차게 뻗은 능선 좌측으로 천길 바위벼랑이 아찔하게 일행을 위협한다. 군데군데 너덜지대에는 구들장 돌탑들이 또 일행을 맞는다. 높이가 4, 5m에 육박하는 탑들이 오봉산 자락에 40여개 넘게 쌓여 있다.

259봉과 조새바위를 지난다. 암릉들이 펼쳐지면서 등산로가 더욱 빛을 발한다. 날카롭게 치솟은 바위는 강함과 부드러움의 조화를 보여준다.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바위가 우측 팔부능선에 우뚝 서 있다. 칼바위다. 칼바위는 통일신라 때 고승 원효대사가 수도 터로 삼고 불도를 닦았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기암이기도 하다. 원효는 용추폭포에서 몸을 깨끗이 씻고 칼바위에 올라 도를 닦았다고 하는데 주변에는 개구리바위, 호랑이바위, 버선바위 등 갖가지 모양의 바위들이 있다. 조선조 태조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해서 태조바위라 불리는 돌도 있다.

3시간여 만에 정상에 도착했다. 능선의 완전종주를 위해서는 내림길에서 좌측으로 가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용추폭포로 하산한다. 용추폭포를 보고 나서도 더 긴 등산코스를 연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용추폭포 맑은 물에 피로 씻어내

드디어 용추폭포다. 맑고 청아한 물소리가 선계를 알리는 전주곡 같다. 높이는 약 15m. 폭포수가 흘러내리면서 물줄기가 시원스레 뿌려진다. 잠시 폭포수 아래 차가운 계곡에 손을 담그고 세수하며 흐른 땀을 씻어낸다. 세속에서 물든 나쁜 마음까지 씻겨나가는 것 같다. 용추폭포 위엔 폐사 터가 있다. 359봉을 끼고 오르면 잠시지만 절터 외엔 큰 볼거리가 없으므로 이쯤에서 접기로 했다.

해평저수지로 하산길을 잡는다. 좌우 협곡 사이로 바위들은 아찔한 수묵화를 펼치고 등산로 주변엔 막 신록들이 색을 키워 연두 빛 수채화를 그려냈다. 저수지 위 주차장에 도착하니 오후 3시가 조금 넘었다. 4시간 30여분이 소요됐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선호하는 반종주 등산을 한 셈이다.

컨디션에 따라 자유로운 등산이 가능하고 원점회귀형 등 다양한 등산 코스를 선택할 수 있다. 산행 시간은 짧게는 2, 3시간여, 전 능선을 완주하는 데는 6~8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완주하겠다는 욕심보다는 즐기며 산을 타고, 언제든지 힘에 부치면 오른쪽으로 탈출한다는 마음으로 임하는 것이 좋다.

이름값을 못하는 명산보다 이름 없는 산에서 비경을 만났을 때 산꾼들은 더 큰 감동을 받는다. 남도 땅끝 먼 거리에 있는 산이라 돌아오는 여정이 지루할 것 같았지만 일행 모두 만족한 산행을 한 덕인지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다. 나오는 길에 충절사에 들러 선현의 의로움을 배우고, 주변에 활짝 피어난 유채꽃과 청보리를 배경삼아 추억을 남기는 것도 산행 후 또 다른 즐거움으로 기억 될 것이다.

글'사진 산정산악회 지홍석 대장 san327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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