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모니 아들이라 내 姓은 '석'이라네
위봉사(경북 칠곡군 가산면 송학리)는 1천여 년 전 신라 말에 창건한 절이다. 기원 소망이 잘 이루어지는 사찰로 유명하며 절터 위 장군샘에서 나오는 장군수를 마시면 무병장수한다고 소문나 있다. 창건 당시부터 절에서 모셔온 석조 미륵보살 좌상은 경상북도 문화재(제394호)로 지정된 석불이다.
위봉사는 학수봉과 봉수봉, 봉학지로 둘러싸여 주변 풍경이 유난히 아름답다. 주지는 석성주 스님으로 출가한지 73년 된 노스님이다. 속랍(俗臘) 80, 성주 스님은 우리나라에 몇 사람 남지 않은 일제강점기 때 출가한 스님이다. 스님의 출가 이야기는 지금 세태로는 납득하기 어렵다.
대구 남산동에서 태어난 스님은 7세 때 낯모르는 스님을 따라 전북 군산 은적사에서 출가했다. 불심이 깊었던 아버지는 어느 날 집으로 찾아온 스님에게 어린 자식의 손을 건넸고 아이의 고사리 손을 잡은 스님은 총총히 먼 길을 떠났다. 어머니와는 작별인사조차 하지 못했다.
"서럽다거나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안했던 것 같습니다. 내가 사월 초파일 생인데, 부처님의 제자가 될 운명이었던 모양입니다."
스님은 전국으로 탁발을 다녔다고 했다. 명산에 오르고, 이름난 절에서도 묵었고, 길섶과 남의 헛간에서도 쉬어갔다. 17세 때 탁발하던 중 대구의 어떤 집에 들어갔는데, 중년 여인이 '우리 ○○이도 스님 나이쯤 됐는데'라면서 밥 한 그릇을 내주었다. 여인이 말한 이름은 스님의 속세 이름이었다. 중년 여인은 어머니의 언니였다. 조카를 알아본 이모는 스님이 밥을 먹는 사이 부리나케 달려나가 전화로 어머니를 불러왔다.
자식을 만난 어머니는 펑펑 울었다. 말도 없이 아들을 절로 보내버린 아버지에 대한 원망도 쏟아냈다. 스님의 걸망을 빼앗고, 옷을 벗겨 모두 불태웠다. 성주 스님은 그런 어머니가 안쓰러웠는데도 좀처럼 '어머니'라는 말이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몇 날을 집에서 보내다가,'어머니, 저는 부처님 자식입니다'라는 편지 한 장 어머니께 써놓고 집을 떠났다. 다시 모친을 만난 것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였다.
성주 스님의 법명은 석성주다. 출가한 사람은 모두 석가모니의 자식이고, 그러니 석씨 성을 따르는 게 맞지만, 요즘은 좀처럼 '석'이라는 성을 붙여 부르지는 않는다. 석성주 스님이 출가할 당시에는 흔히 '석'이라고 성을 밝혀 불렀다고 한다. 요즘은 큰스님쯤 되면 대부분 탁발하지 않지만 예전 스님들은 일 년에 며칠씩 꼭 탁발을 했다.
"불가에서 탁발은 구걸이 아닙니다. 탁발을 통해 석가모니 부처님의 말씀을 깨닫고, 세상을 배우는 것입니다. 탁발(托鉢)은 '바리때를 갖고 부탁한다'는 뜻인데, 그릇 하나와 목탁 하나를 들면 세상의 음식이 모두 내 것이고, 걸망 짊어지고 나서면 어디나 내 갈 곳이고, 내 집이라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니 탁발해서 얻은 것은 바랑에 넣어두었다가 가난한 집에 내려놓을 일이지 스님이 가질 것은 아니지요."
어디를 가나 먹을 것이 있고, 어디를 가나 쉴 곳이 있으니, 탁발은 결국 '내 것'을 염두에 두지 말라는 가르침인 것이다. 그래서 옛 스님들은 나이가 많아도, 절에 쌀이 있어도 일 년에 며칠씩은 탁발을 다녔다고 했다. 음식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부처님의 뜻을 새기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성주 스님은 언제나 걸어 다녔다고 했다. 자동차 탈 일도, 밥을 사먹을 일도 없으니 돈은 필요없었다고 했다. 누군가가 돈을 주면 그 돈을 사람 많이 다니는 네거리에 두고 떠났다고 했다.
"걸망에 바리때 하나 넣고, 목탁을 들면 이미 쌀이 오천 석입니다. 쌀, 집, 옷, 물, 나무 필요한 것은 이미 스님에게 모두 있지요. 중이 내 것을 가져야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성주 스님은 속랍 80에도 맑은 얼굴에 편안한 미소를 가졌다. 그는 '공'(空)을 깨달으면 어떤 것에도 구애될 것이 없고, 구애받지 않는 자는 영생불사한다고 했다. '공'의 이치를 깨달은 자의 육신이 죽으면 한줌 흙으로 돌아갈 뿐, 어디에도 가지 않는다고 했다. 공을 깨달은 자는 염라대왕의 명부에서도 이름이 빠진다고 했다.
"공은 시간의 차이가 없습니다. 억만년 전의 공이 곧 오늘의 공입니다. 둘은 하나이고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서도 '공의 자리'를 깨닫지 못하면, 아무리 오래 절밥을 먹었다고 해도 결국 '밥도둑'일 뿐입니다."
스님은 사람은 세상에 올 때 이름도 없이 빈손으로 왔으니, 떠날 때도 남기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재산은 고사하고 한 뼘 땅에 이름 석자라도 남기면 업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했다.
"옛날에는 큰절 해탈문에도 대문을 달지 않았습니다. 문을 달면 문패를 달아야 하는데, 문패를 달면 이름을 만드는 것이 되지요. 사실은 종단도, 절 이름도 필요없다고 봅니다. 이름을 만들고 종단을 만들고, 계보를 만드느라 엉망이 된 면이 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부처님 제자인데 구별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스님은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화장해서 자주 가볼 수 없는 곳에 흩뿌려라'고 했다. 부모님은 흙이 되고 바람이 되어 자유롭게 훨훨 떠났는데, 자식들이 마음속에 붙잡아 놓고 20년, 30년, 40년이 지나도록 슬퍼한다는 말이었다. 왔으니 가야 하고, 떠난 사람을 마음에 잡아두지 않는 것, 그 역시 '공'(空)이라고 했다.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사진: 성일권기자 sungi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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