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함락 하루전 3등열차 타고 '야반도주'

입력 2010-04-23 07:44:12

이승만 대통령 내외 피란길

이승만 대통령은 서울이 함락되기 만 24시간 전인 27일 새벽 3시, 서울을 떠나야 할 위급한 상황에 몰리고 있었다. 경무대를 방문한 조병옥 박사와 이기붕 서울시장, 김태선 치안국장 등의 강력한 권유로 피란길에 올랐으나 대통령의 피란길은 너무도 쓸쓸했다. 주룩주룩 비까지 내리고 있었다.

황규면 비서관과 경호경찰관 3명만이 대통령 내외를 수행했다. 극비에 황급히 떠나는 바람에 서울역에 마련된 특별열차마저 증기기관차에다 3등 객차 2량(輛)을 연결한 것뿐이었다. 이 대통령 일행을 태운 특별 열차는 기적도 울리지 않은 채 서울역을 미끄러져 나갔다. 커버도 씌우지 않은 객차의 시트는 때에 잔뜩 절어 있었고 차창마저 깨져 스산한 비바람이 스며들었다.

이 대통령의 연세 74세. 노구를 이끌고 피란길에 오르기에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견디기 힘들었다. 황 비서는 경황 없이 경무대를 빠져나오는 바람에 미처 담요 한 장 마련하지 못했다. 그는 노구의 대통령 내외가 얄팍한 외투를 덮고 시트에 기대어 떨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자괴지심에 빠져 안절부절못했다.

마침내 날이 밝아오자 뜨거운 아침 햇살이 비치고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철도 연변의 평화로운 농촌풍경이 펼쳐졌다. 특별열차가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을 끼고 왜관을 지날 무렵 차창에 비친 낙동강 연변은 한 폭의 풍경화처럼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초여름의 훈훈한 강바람이 불어오고 모 심기가 한창인 들판에는 농민들이 바쁜 일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이 대통령은 전쟁이 일어난 줄도 모르고 평화롭게 농사일에 매달려 있는 농민들의 일상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마침내 황 비서를 향해 "여보게, 나는 평생 처음으로 판단을 잘못 했나 봐. 그자들한테 속았어" 하고 운을 떼며 긴 탄식과 함께 회오(悔悟)의 한숨을 삼켰다고 했다. 그자들한테 속았다는 말은 아마도 안이한 전황 보고만 되풀이한 신성모 국방장관과 채병덕 참모총장을 가리키는 말 같았다.

이용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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