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미의 책속 심리] 황무지(The Waste Land)/T.S 엘리어트

입력 2010-04-14 07:54:01

K씨는 자신의 아들이 친아들이 아니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떨칠 수가 없어서 도움을 받으러 병원을 찾아왔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귀한 아들인데 친자가 아니면 어쩌나 하는 의심이 들면서 불안해지고 온통 그 생각뿐이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한다. 아들을 잉태하던 날부터 차례대로 기억을 수없이 반복해서 더듬어보아도 친아들임이 분명하고 아내도 부정한 여자가 아님을 알지만 의심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친자확인 검사에서 친자라는 결과를 받고도 여전히 의심을 떨칠 수가 없고 아내를 의심하는 자신을 용서할 수도 없고 '만약 친자가 아니라면?' 하는 불안이 들면 세상이 무의미해져서 살 의욕조차 없다고 했다. 자식이 친자가 아닐만한 근거는 전혀 없다. 실제로 자녀는 친자가 맞다. 그러나 통제할 수 없는 그의 생각이 '친자가 아닐 거야' 라고 끊임없이 속삭이는 것이다. 그는 강박사고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의 저자 엘리어트도 평생 강박불안을 가지고 살았다. 그는 지나치게 신중하고 정확성을 기하느라고 시간을 끌곤 하였다. 특히 성과 육체를 혐오하는 결벽증이 있어서 부인과 성생활도 하지 않았다. 꽃향기 만연한 계절에 욕정에 몸을 던지는 사람들의 행위를 엘리어트는 불결하기 짝이 없는 것으로 간주했다. 욕정의 발산인 정액이 말라서 가루가 되어 꽃가루처럼 공기 중에 떠다닐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그에게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인지도 모른다.

강박증을 가진 사람들은 정서적 교류를 가장 힘들어한다. 사랑의 열정으로 몸살을 앓지도 않고 이별의 눈물을 흘리지도 않는다. 감정의 고통을 느끼게 될까봐 지적인 세계로 더욱 파고 들거나 일에 열중하여 감정과 사건을 분리시키기 때문이다.

메마르고 냉담했던 엘리어트는 결혼 생활도 평탄치 않았다. 변덕스럽고 의존적인 부인은 예민한 엘리어트의 심정을 전혀 알아주지 못했고 그를 수렁으로 몰아넣었다. 엘리어트는 생계를 위해 적성에도 맞지 않는 은행일을 하루 종일 해야 했다. 사랑하지도 않는 아내와 불필요한 성생활로 체력을 낭비하게 하고 아내의 생활비를 벌기 위해 자신의 시간과 재능을 탕진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에게 엄청난 스트레스였다. 결혼 생활은 정력 낭비, 시간 낭비, 재능 낭비, 인생 낭비일 뿐이었다. 이 모든 낭비가 집결된 '낭비의 땅'(waste land)이 바로 황무지이며 결혼 생활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탈장이 심해서 친구들과 어울려 뛰어놀지도 못하고 늘 혼자 있고 수줍음이 많았던 엘리어트는 결혼에서 오는 실패감을 견디기 위해 오로지 지적인 세계로 몰두했다.

감정적 소용돌이를 두려워하는 강박증 환자들은 동토에 홀로 서 있는 사람들이다. 아무리 거부해도 봄은 오고 꽃은 핀다. 엘리어트가 시 창작을 통해 자신의 결혼생활의 환멸을 폭로하고 그럼으로써 위로받았듯이, 강박증을 가진 사람들도 안전한 봄을 맞을 수 있기를 바란다. 강박증은 의외로 빨리 치료될 수 있다.

마음과마음 정신과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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