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때 대구 읍성이 헐리고, 일본인들이 몰려들었다. 자연 대구 도심의 내용물도 '전통'에서 '현대'로 옷을 갈아입었다.
대구 도심은 일인 상점으로 채워졌다. 대구 북성로는 모토마치(元町)라 불린 상업의 중심지였다. 조경회사 스기하라합자회사, 목재회사 구로가와 재목점, 대구 최초 목욕탕 조일탕, 대구 최초 백화점 미나카이, 대구 곡물회사, 마쓰노 석유회사, 철물점 등이 생소한 일본어 간판을 내걸고 늘어섰다.
북성로는 식당, 요릿집, 영화관, 여관 등이 있던 무라카미초(향촌동)와 연결돼 대구 최고의 번화가를 이뤘다. 특히 미나카이는 5층 건물로 지어질 당시 대구 최고층 건물로 기둥 사이에 붉은 벽돌을 쌓고 타일을 붙였으며 안에는 유일하게 엘리베이터까지 설치됐다. 꼭대기층에는 카페가 있어 지방의 재력가들이 드나들었다.
약재상들이 자리 잡은 남성로는 서문시장과 함께 민족 자본의 중심이었으며 주변 골목에는 객주, 거간들이 묵어가는 여관, 마방, 주점, 요정 등이 위치했다. 미국의 북장로파 선교사들이 세운 남문예배당(현 제일교회)이 있고 건너편에는 교남YMCA, 서편으로 희도학교가 위치하는 등 선교사업의 중심지가 됐다.
서성로 일대에는 조선인 거부들이 많이 살았다. 골목에 남은 한옥들과 붉은 벽돌 담장은 근대기 대구 부자들이 살던 곳임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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