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석 점유율 겨우 절반…할인권 남발로 출혈경쟁
대학생 이모(23·여)씨는 최근 한 뮤지컬을 보기 위해 대구의 한 공연장을 찾았다가 깜짝 놀랐다. 이씨는 "객석이 절반밖에 안 차 썰렁했다. 객석의 열기가 없다 보니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고 기억했다. 공연 기획자 A씨는 관객 동원 부진으로 시름에 빠졌다. 그는 "타 기획사 관계자들과 만나면 '차라리 공연을 안 하는 게 돈 버는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고 답답해했다.
◆공연계 사상 최악의 불황
대구 공연계에 불황의 그늘이 깊게 드리우고 있다. 최근 2, 3년간 지역 공연 산업의 성장을 주도했던 대형 뮤지컬과 소극장 연극들이 지난해 하반기부터 심각한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 객석 점유율이 절반도 못 미치는 공연이 속출하면서 제작비도 건지기 어렵다는 암울한 전망이 이어지고 있다.
서울 대학로 장기 흥행작인 연극 '그 남자 그 여자'를 4개월째 공연 중인 문화예술전용극장 CT. 이곳 전광우 대표는 "이번 공연 매출액은 통상의 절반밖에 안 될 것 같다. 그나마 지역 온라인 티켓 판매 순위에서 상위권을 고수한 작품인데도, 판매량은 지난해에 비해 30~40% 줄것같다"고 걱정했다. 박상원, 남경주 등 인기 배우가 출연하는 연극 '레인맨'을 공연 중인 파워엔터테인먼트 이철우 대표는 "시장이 와해되는 기분"이라고 단적으로 표현했다. 그는 "공연은 많아지고 있는데 관객은 오히려 줄어들고 있다"며 "2007년 좋은 성적을 거뒀던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도 올해 2월 공연 때는 관객이 절반 이하로 줄었다"고 말했다.
높은 작품성으로 기대를 모았던 연극 '웃음의 대학'도 2월 대구 공연에서 부진을 면치 못했다. 고도예술기획의 김종성 대표는 "지난해 서울 대학로 '연극열전2'에서 가장 관객이 많았던 작품인데, 지역에선 참패했다"며 "인기배우에 코미디 장르인데도 객석 점유율이 40%를 밑돌았다"고 말했다.
대형 뮤지컬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지난해 12월 '살인마 잭' '시카고' '김종욱 찾기' '올슉업' 등 4, 5개 작품이 같은 시기에 쏟아졌고, 공연 비수기로 치는 올 1, 2월에도 '모차르트' '맨 오브 라만차' '헤어스프레이' '헤드윅' 등 대작들의 대구 공연이 이어졌지만, 일부를 제외하고는 성적이 신통찮았다. 올 상반기 공연 중 가장 좋았다는 '모차르트'의 경우 아이돌 그룹 '동방신기' 출신의 시아준수가 출연한 회만 만석을 채웠을 뿐, 평균 객석 점유율은 기대를 밑돌았다.
◆원인은 공연의 과잉 공급
대구의 공연산업은 최근 몇 년 새 뚜렷한 성장세를 보여왔다. 견인차는 소극장 연극과 뮤지컬이었다. 대구경북연구원에 따르면 대구의 연극·뮤지컬 공연 업계의 매출은 2006년 27억7천만원에서 2008년 129억5천만원으로 4배 이상 커졌다. 조사를 수행한 (재)대구디지털산업진흥원 관계자는 "같은 기간 대구 공연계는 연평균 성장률 116.14%, 순이익 41.62%를 거뒀다"고 추산했다.
이 같은 호황이 불과 1년 새 반전된 원인을 업계에선 '공급 과잉'에서 찾고 있다. 구매력을 가진 관객은 한정돼 있는데, 공연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인터파크 대구지사에 따르면 지난해 뮤지컬 118편(31만2천명 관람)을 포함해 총 319개 작품이 판매됐지만, 최근 매출이 20%가량 떨어졌다. 이곳 손기성 팀장은 "2008년을 정점으로 2009년부터 대구 공연계가 주춤하기 시작했고 올 상반기에는 시장을 키워줄 만한 대형 흥행작이 보이지 않는다"고 분석했다.
관객이 없다 보니 초대권과 할인권이 남발되고, 일부에선 학교 숙제를 위해 공연장을 찾는 '리포트 관객'으로 자리를 채운다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대구와 밀접한 서울 공연계는 이미 '몸집 줄이기'에 들어갔다. 서울 공연프로듀스협회 이봉규 사무국장은 "제작사들이 작품 제작을 보류하는 분위기"라며 "관객 동원을 위해 할인권을 남발하다 보니 만석을 해도 손해"라고 했다. 메이저 제작사들조차 배우 개런티, 무대 제작비, 의상비 등 제작비 절감에 매달리고 있고 신작보다는 투자비가 적은 재공연작 위주로 선택하고 있다. 그는 "신규 제작사들이 늘면서 작품 편수는 증가했지만 경쟁에서 밀려나면서 도태되고 있다"고 말했다.
더 심각한 것은 호황의 통계는 있어도 불황의 통계는 없다는 것이다. 공연 성적을 노출하기 어려운 업계의 사정 탓이기도 하지만 공연문화도시를 표방한 대구에서조차 관람 인구 규모나 추이에 대한 최근 통계를 찾아보기 어렵다. 서울 대학로의 공연제작사 이다의 손상원 대표는 "공연과 관객이 함께 늘어야 하는데 공연만 일방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대구는 아직 서울만큼 과잉의 상황은 아니지만 어떤 연령의 관객들이 어떤 형태의 공연을 선호하는지, 뮤지컬·연극 관람 인구는 어느 정도인지에 대한 최소한의 데이터를 축적해야 전망과 대책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엇갈린 전망
다소 희망적인 전망도 있다. 성우 기획사의 배성혁 대표는 "서울은 이미 최악의 상황에 접어들었지만 부산, 대전, 광주 등 타 광역시에 비하면 대구의 상황은 여전히 나은 편"이라며 "올해 뮤지컬페스티벌과 하반기 대작 공연이 이어지면 분위기가 호전될 것"이라고 했다.
대구가 가진 우수한 공연장 인프라, 많은 공연 편수가 타 지방 관객들을 불러들이는 발판이라는 것 역시 부인하기 어렵다. 대구 4천명을 포함해 전국 1만여명의 회원을 가진 동호회 '뮤클'의 한 관계자는 "부산의 경우 1천석 넘는 공연장이 부산시민회관과 문화회관 단 2개뿐"이라며 "아예 공급조차 없는 지방 시장에 비하면 대구는 완급조절을 통한 공연시장의 회생이 어느 정도 가능할 것"이라고 했다.
현 시점에선 어두운 전망이 지배적이다. 한 지역 기획자는 "과거 4, 5년을 통틀어 몇몇 대작 흥행작들이 대구는 '공연 불패의 도시'라는 거품을 낳았다"며 "지역 공연계 불황은 이제 시작인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최병고기자 cb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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