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산책] 나팔꽃

입력 2010-04-07 07:12:35

화분에 물을 주다가 깜짝 놀랐다. 꽃기린은 사시사철 금박이 박힌 화려한 분홍꽃을 피우는데 오늘 아침에는 그 사이에서 엉뚱하게도 보라색 꽃 한송이를 발견했다. 기쁜 소식을 전해 준다는 나팔꽃이다. 너무나 신기하고 반가운 마음에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더니 온식구가 모여들었다.

봄볕이 따사로워지면서 화분에 병아리 주둥이 같은 싹 하나가 돋기 시작했다. 풀인가 싶어 몇 번 손톱을 가까이 댔다가 그것도 목숨이거니 애처로워 두고 보았다. 조금 자란 줄기는 공중으로 손을 뻗어 며칠간 허우적거리다가 꽃기린을 구세주마냥 겁 없이 틀어 안았다. 여린 줄기가 꽃기린의 몸에 박힌 가시의 사연을 하나씩 알아가면서 꽃을 피우기까지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으리라.

꽃기린은 고난을 깊이 간직한다는 꽃말처럼 잎이 떨어진 줄기에는 온통 가시투성이다. 가시는 아름다운 결과가 있기까지 감추어진 시련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 날카로운 가시를 용하게도 요리조리 피해가며 여린 줄기를 살살 말고 올라가는 모습이 대견하고 기특해 물을 줄 때도 눈여겨보았는데 보답이라도 하듯 오늘 꽃봉오리를 밀어 올린 것이다. 마디마다 고난의 가시를 달고 핀 꽃기린 사이에 철없는 나팔꽃 하나가 끼여 핀 모양새지만 딴에는 죽을 고생을 해서 올라간 길일 것이다.

오래 전부터 내 마음속에도 작은 씨앗 하나를 심어두었다. 사십여년 간의 녹록지 않은 삶들이 거름이 되었는지 딱딱했던 씨앗이 세월의 비를 맞아 녹아들면서 싹을 틔웠다.

무작정 뛰어든 문학의 길에는 신기한 것도 예상치 못한 일도 많았다. 눈이 어두웠던 나는 처음에는 많이 허우적거렸고 어느 순간 내 손에는 잡히는 것을 놓지 않으려고 오직 감아 올라가는 일에만 매진했다. 때론 가시에 상처가 나는 일도 있었고, 감고 올라갈 길을 못 찾아 제자리를 정신없이 맴돌기도 했었다. 그러던 내 줄기에도 볼록한 꽃망울이 하나 맺혔다.

그 망울 속에는 사람들의 소리가 소복소복 들어 있다. 세상일에 지친 이들이 펼쳐 보았을 때 잠시 한숨 돌리며 웃을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꽃들이 향연을 베푸는 사월에 꽃기린 사이의 나팔꽃처럼 나의 꽃도 슬쩍 고개를 내밀게 되었다.

세상에는 좋은 책들이 너무 많다. 수많은 작가들이 오감으로 수놓은 고난의 문자들이 서점마다 책장 가득하다. 이 책들 속에 내가 철없이 끼인 나팔꽃이 되었다.

주인석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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