뽕잎 값보다 싼 누에고치 가격…양잠농 고통 딛고 제사공장 번창
섬유산업은 전통적으로 대구를 대표하는 산업이다.
조선 후기부터 한말까지 대구는 목면의 집산지였다. 일제의 침략으로 목면업이 쇠퇴하자 대신 생사업이 번창했다. 대구에서 생사업을 발전시킨 것은 조선생사, 야마토제사, 가타쿠라제사 등 일본 자본가들이었다. 이들 기업은 1918년을 전후해 대구에 대규모 제사공장을 설치하고 조선 노동자를 고용해 생사를 생산했다.
생사업은 산업혁명 당시부터 일본 자본주의가 외화를 벌어들이는 주력 산업이었다. 그래서 일제는 조선을 강점하자마자 바로 누에고치를 증산하는 식민정책에 착수했다. 먼저 누에 품종을 일본 품종으로 교체하고, 계획된 목표에 의거해 뽕밭의 면적과 양잠 농가를 확대시켜 갔다. 고치 생산이 늘자 대구에도 일본 제사 자본이 진출해 대규모 공장을 건설하고 생사 생산을 시작했다.
일제는 조선에 진출한 일본 제사 자본을 위해 고치의 증산을 강제로 확대하고 공판제도를 실시했다. 고치의 공판제도는 양잠농가가 생산한 고치를 일제가 지정한 공동판매장에서만 판매하도록 강요했다. 일시적으로 허용되었던 자유판매는 공판제도가 강화되면서 전면 폐지됐다. 공동판매에서 고치 가격은 도지사가 지정한 구매자가 결정하였는데, 경북에서 고치 구매자로 지정된 것은 언제나 대구의 제사 공장들이었다. 말하자면 일제는 조선의 농민들에게 고치 생산을 강요하고, 생산된 고치를 조선에 진출한 제사 자본이 자신이 결정한 가격으로 독점 구매할 수 있게 특혜를 제공한 것이다.
이런 특혜로 고치 가격은 생산비의 절반 수준에서 결정되는 경우가 많았고, 심지어 양잠에 사용된 뽕잎 값에도 못 미치는 경우도 있었다. 양잠농민들이 공판에 저항하는 것은 당연했다. 농민들이 양잠과 공판을 기피하자 일제는 개별 농가별로 고치 생산량과 공판량을 할당하고 관리나 경찰, 농회 직원 등을 동원해 강압적으로 목표를 달성해 갔다. 고치의 공판량을 확대하기 위해 명주를 짜는 베틀까지 몰수해 버렸다. 조선에 진출한 일본의 제사 자본은 식민지 권력이 강요한 조선 농민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크게 번창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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