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기 넣지 마세요" 신신당부했는데… 채식주의자 설자리 없는 한국

입력 2010-04-03 07:49:28

직장인 채식주의자들은 식사를 밖에서 해결하기 때문에 채식주의를 유지하는 것이 힘들다고 한다. 음식점은 많지만 채식주의자들이 먹을 만한 음식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직장인 채식주의자들은 식사를 밖에서 해결하기 때문에 채식주의를 유지하는 것이 힘들다고 한다. 음식점은 많지만 채식주의자들이 먹을 만한 음식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현미채식을 하는 최세진씨의 도시락. 그녀는 도시락이 채식주의자들의 식사 고민을 해결해 주는 한 방법은 되지만 좋은 대안은 아니라고 말한다. 사진은 최세진씨의 도시락.
현미채식을 하는 최세진씨의 도시락. 그녀는 도시락이 채식주의자들의 식사 고민을 해결해 주는 한 방법은 되지만 좋은 대안은 아니라고 말한다. 사진은 최세진씨의 도시락.

채식 열풍이 불고 있다. 채식에 대한 선호는 오래 전부터 있었지만 최근 인기는 사뭇 다르다. 채식 체험과 채식주의자들을 위한 인터넷 카페가 활성화되고 있으며 언론에서도 잇따라 관련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심지어 '채식주의자'라는 영화까지 개봉됐다.

하지만 채식 권하는 사회분위기가 형성된 것과 달리 채식주의자들은 한결같이 한국에서 채식주의자로 살아가는 것이 힘들다고 말한다. 채식주의자의 의견과 식성을 존중해주는 문화가 발달한 서구에 비해 우리나라는 채식주의자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많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채식주의자들을 위한 인프라도 제대로 구축돼 있지 않다. 채식전문음식점이 생기고 있지만 여전히 부족한 상태며 채식주의자들을 위한 식품 개발도 지지부진하다. 채식주의자들의 경험을 통해 한국에서 채식을 하는 것이 왜 어려운지 그 속을 들여다 봤다.

◆수십년 채식주의가 한순간 물거품 된 사연

호주 태즈매니아의 주도 호바트시에 거주하는 에이드리안 브로드비(60)씨는 20년 넘게 채식을 고집해 온 채식주의자다. 그런 그가 한국을 찾은 지 하루 만에 신념같이 지켜온 채식주의가 무너졌다. 한국 남자와 결혼한 딸을 보기 위해 지난달 말 대구를 찾은 브로드비씨는 딸 친구(한국인)의 안내를 받아 딸과 함께 팔공산 인근에 있는 한 음식점을 찾았다.

차림표를 보며 육류가 들어가지 않은 음식을 찾다 빈대떡을 고른 브로드비씨는 주문하면서 몇번이나 고기를 넣지 말라고 당부를 했다. 잠시 후 빈대떡을 기분 좋게 먹던 브로드비씨는 깜짝 놀랐다. 입에 씹히는 것이 있어 뱉아 보니 고기가 나왔기 때문이다. 항의를 해도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음식점을 나왔다. 그는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타인에 의해 채식주의가 깨졌다는 사실에 상당히 기분이 상했다고 한다. 이후 브로드비씨는 일주일간 대구에 머물면서 한국 음식은 거의 먹지 않았다. 인도·베트남 음식점 등에서 식사를 해결했다고 한다.

◆먹을 만한 것이 없다

직장을 다니는 채식주의자들은 잦은 회식과 식사를 밖에서 해결해야 하는 까닭에 채식주의를 지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이들의 고충을 알아보기 위해 채식주의자의 조언을 얻어 기자가 직접 점심식사 체험에 나섰다. 우선 음식점 찾는 것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국밥·일식·생선구이·재첩국·삼계탕 등을 제외하고 보니 회사 근처에 채식주의자들이 갈 만한 식당이 눈에 띄지 않았다. 버섯전골집과 칼국수집이 눈에 들어왔지만 육수를 사용하기 때문에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무심히 지낼 때는 몰랐는데 막상 채식주의자 입장이 돼 보니 한 끼 식사를 해결하기도 쉽지 않았다.

골목을 이리저리 헤매다 어렵게 찾은 곳이 한식당이다. 한식당에 들어가 벽면을 보니 육개장·추어탕·생태탕·비빔밥·콩나물밥 등의 메뉴가 붙어 있다. 기자는 먼저 주인에게 채식체험을 한다고 밝힌 뒤 일행들과 다른 것을 주문해야 한다고 양해를 구했다. 그랬더니 대뜸 "따로 시키면 시간도 많이 걸리고 주방에서도 좋아하지 않습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식사체험에 동행한 죄(?)로 할 수 없이 일행들은 기자와 같은 음식을 주문하기로 결정한 뒤 비빔밥을 주문했다. 그런데 오늘은 비빔밥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선택의 여지도 없이 콩나물밥을 시켜야 했다. 게다가 콩나물밥에는 고명으로 고기가 얹어져 있었고 딸려 나온 국도 육개장이었다. 채식체험을 한다고 분명히 말했는데 주문 받으면서 귀담아 듣지 않았던 모양이다.

반찬은 김치, 오이소박이, 두부, 우엉, 미나리무침, 무겉절이, 새우볶음 등이 나왔다. 오징어 젓갈이 들어간 무겉절이와 새우볶음은 먹을 수 없다. 콩나물밥에 들어간 고기를 골라낸 뒤 육개장을 식탁 한쪽에 밀어놓고 김치, 두부, 미나리무침에 의존해 밥을 먹으면서 왜 직장을 다니는 채식주의자들이 도시락을 싸 오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도시락이 대안이 될까

도시락은 직장인 채식주의자들이 고심 끝에 생각한 식사 해결책이다. 한 달 전 채식을 시작한 직장인 최세진(33·여)씨는 점심 때마다 함께 식사를 하는 직장 동료들에게 부담을 주는 것이 싫고 뭘 먹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도 덜기 위해 며칠 전부터 도시락을 싸 다닌다.

현미밥과 김치, 나물 등으로 구성된 그녀의 도시락은 단출하다. 하지만 도시락을 준비하는 일은 만만치 않다고 한다. 고기·생선·우유·계란을 먹지 않아 살 만한 반찬재료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손쉽게 요리할 수 있는 멸치, 어묵 등은 살 수 없어 두부, 야채, 나물 종류만 구입한다. 그렇다 보니 늘 그 나물에 그 밥이다. 손도 많이 가고 생활비도 더 든다고 한다. "나물 반찬은 오래 보관할 수 없어 거의 매일 만들어야 하고 채소값도 웬만한 음식재료보다 비쌉니다. 나름 열심히 준비했는데 도시락을 보면 표시도 나지 않습니다."

또 그녀는 남성들은 직장에 도시락을 들고 출근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했다. "같이 밥 먹고 술 먹는 것이 업무의 연장이라고 생각하는 직장문화가 뿌리깊게 박혀 있어 자칫하면 소외될 수 있습니다."

◆근본 원인·해결책은 무엇인가

채식주의자들과 전문가들은 채식문화에 익숙하지 않는 사람들의 인식이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한다. 최세진씨는 채식을 시작한 뒤 피부가 맑아지고 몸도 가벼워지는 것을 느끼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채식이 가져다 주는 이점 외에 여러 가지 어려움도 호소한다. 회식 자리에서 동료들이 "한 입 먹는 것은 괜찮다.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 우리만 먹으려니 미안하다"며 자꾸 고기를 권하는 바람에 곤욕을 치른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는 것.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저렇게 건강을 챙기나"라는 곱지 않는 시선도 받았다고 한다.

이에 대해 18년간 현미채식을 실천해 온 황성수(59) 대구의료원 제1신경외과장은 사람들의 인식이 쉽게 바뀌지 않기 때문에 한국의 채식문화를 개선시킬 수 있는 단기적인 방법은 없다고 말한다. "도시락이 부담스러운 직장인들의 경우 단골식당을 정해놓고 채소 위주의 식단을 주문하는 것도 한 방법이지만 그것도 쉽지 않습니다. 회식 자리에서는 신념을 꿋꿋이 지키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그는 장기적으로는 정부, 지방자치단체, 시민단체 등이 중심이 돼 식생활 개선운동을 전개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했다. "채소에 비해 고기, 생선, 우유, 계란 등이 몸에 더 좋고 안 먹으면 건강에 문제가 생긴다는 생각이 고정관념처럼 박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런 음식을 많이 찾다 보니 음식점마다 고기를 판매하는 순환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사회가 채식주의자들이 설 자리를 마련해 줘야 합니다."

상황이 좋아지고 있지만 아직 한국의 채식문화는 외국에 비해 많이 일천한 실정이다. 소수자의 의견을 존중해 주는 인식 변화가 채식문화 정착의 대안으로 거론되고 있지만 많은 시간을 요하기 때문에 채식주의자들의 고민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이경달기자 sarang@msnet.co.kr

※ '채식주의'(vegetarian)라는 단어가 '채소'(vegetable)에서 온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실제 어원은 '완전한, 순수한, 건강한' 등의 뜻을 가진 라틴어 'vegetus'다.

채식주의자는 채식 형태에 따라 여러 가지로 구분된다. 가장 일반적인 분류로는 유제품과 동물의 알을 비롯해 모든 종류의 동물성 음식을 먹지 않는 비건(vegan), 육식과 동물의 알은 금하지만 유제품은 먹는 락토(lacto), 육식과 유제품은 먹지 않지만 동물의 알은 먹는 오보(ovo ), 육식은 금하지만 유제품과 동물의 알은 먹는 락토 오보(lacto-ovo) 등으로 나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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