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험심을 핑계로 타인의 세계를 훔치다
여행은 이제 더욱 놀라운 발견, 더욱 험난한 여정, 더욱 파란만장하고 더욱 자극적인 모험을 광고한다. '오지 여행'은 새로운 트렌드가 되었다. 타인이 가보지 않은 낯선 곳, 새로운 발견의 무대를 찾아 세계의 더욱 깊숙한 곳들이 꿈과 환상 속에 파헤쳐진다.
2005년 여름 나는 뜨거운 열대의 탐험가였다. 건기의 아프리카에서 쩍쩍 갈라지는 강바닥에 맨발로 서서 작열하는 태양에 온몸을 태우던 탐험가. 염소와 닭이 여행자의 짐들과 뒤엉킨 낡은 트럭, 숯검정이 날아드는 증기기관차, 오지의 섬을 탈출하던 경비행기, 녹슨 선체가 한없이 느리게 움직이는 여객선, 자전거 택시와 오토바이 택시, 이러한 온갖 옛날영화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신기한 탈것들에 몸을 실은 채 장장 8개월간 아프리카 대륙에 뛰어들었다. 코끼리, 하마, 얼룩말, 버팔로, 바오밥나무와 망고나무, 그리고 전쟁과 기아에 지친 헐벗은 난민들을 만났고, 새로운 문명의 탑을 쌓아올린 활기찬 아프리카의 도시들과 노예무역 시대의 문명의 그림자 같은 유령의 섬들을 가보았고, 아프리카인의 삶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양 더없이 평화롭고 아름답기만 한 사막과 초원, 인도양의 석양 속에 잠기기도 했다. 더위에 지친 머리카락은 빡빡 밀어버렸고, 잘 씻지 못한 몸은 언제나 꼬질꼬질했으며, 제대로 된 식당을 발견하기조차 어려워 끼니는 망고나 바나나, 옥수수로 때우기 일쑤였다. 모기떼와 날파리떼, 개미떼, 온갖 이름 모를 벌레들과 싸우다가 지쳐 나중엔 벌레 따윈 아무렇지도 않게 되었으며, 아침마다 말라리아약 한알씩을 먹으며 소화불량에 시달렸고, 그 외에도 원인불명의 배탈과 설사, 눈병을 달고 살았다.
# 아프리카 열대 탐험기에 열광
아프리카에서 돌아온 나는 홀로 겪은 산전수전공중전에 잔뜩 자부심을 실어 여행책을 발간했다. 독자들은 미지의 세계에 단신으로 뛰어든 한 여자에 대해 호기심과 감탄, 자신들도 탐험가의 대열에 합류하고 싶다는 열망을 피력했다. 더 이상 발견할 것도, 정복할 곳도 없는 심심한 여행의 시대, 시작되자마자 끝나버린 여행의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 여행은 다시 기획된다. 여행은 이제 더욱 놀라운 발견, 더욱 험난한 여정, 더욱 파란만장하고 더욱 자극적인 모험을 광고한다. '오지 여행'은 새로운 트렌드가 되었다. 타인이 가보지 않은 낯선 곳, 새로운 발견의 무대를 찾아 세계의 더욱 깊숙한 곳들이 꿈과 환상 속에 파헤쳐진다. 21세기의 여행자는 콘키스타도르의 후예가 된 것이다.
'콘키스타도르'는 콜럼버스 이후 15~17세기 대항해시대에 아메리카 대륙에 닻을 내린 스페인 정복자이다. 그들의 꿈은 미지의 세계에 숨어 있다는 황금의 도시 '엘도라도'(El dorado)를 발견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남다른 모험정신을 가진 자, 용기 있게 떠나는 자, 더욱 새롭고 더욱 스펙터클한 꿈을 꾸는 자였다. 그러나 새로운 세계에 대한 야심만만한 꿈은 잔인한 정복욕이 되었다. 콘키스타도르는 무자비하게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황금을 약탈했으며 잉카 제국과 아스텍 제국 등 토착문명을 파괴하고 자신만만한 유럽의 문명을 새로운 땅에 이식시켰다. 한 세계가 다른 세계를 발견하는 항해시대는 결코 낭만적이지 않았다. 발견과 정복은 결국 타인의 땅을 침입하는 모험이며, 모험은 본질적으로 침입의 습성을 닮았다. 그 세계는 나의 세계가 아니기 때문에 흥미진진한 것이고, 그러므로 타인의 세계에 침입하는 것은 자극적인 모험정신을 부추긴다.
# 일상에 갇힌 삶은 지루해지고
인류에게는 태초부터 여행의 습성이 있었다. 인류의 할머니인 '루시'는 아프리카에서 발견된 원시인류의 화석이다.(인류의 아프리카 기원설은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는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듯하다.) 루시의 후예들은 아프리카에서 걸어 나와 아시아, 아메리카까지 오랜 시간 동쪽으로 여행하며 인류를 낳았다. 유목시대에 인류는 종족의 운명을 특정한 땅에 묶어두지 않았다. 삶은 자연스럽게 자유와 모험, 그 자체였으며 늘 새로운 땅에서 새롭게 개척되는 것이었다. 자연의 질서가 변화무쌍하듯이, 인간의 삶도 생성과 소멸의 변화무쌍한 질서 속에서 늘 치열했고 흥미진진했을 것이다.
자연의 질서를 거부하고 삶을 인간만이 누리는 특별한 일상에 안락하게 가두어두는 순간, 삶은 지루해진다. 인류는 특정한 땅을 점령했다. 그리고 동시에 그 땅에 묶여버렸다. 인류는 이제 나의 일상이 묶여있는 '여기'의 바깥에 '다른 곳'이 있다는 꿈과 환상이 필요해졌다. 삶이 예속된 땅에서는 '잠시의 외출'이 그나마 자유를 준다. 잠깐의 여행이 삶의 에너지가 된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떠난다. 더 낯설고 먼 곳으로, 더 엄청난 모험이 있는 곳으로. 그러나 여행은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나는 자연스러운 유목인의 여행이 아니라, 익숙한 삶으로 돌아오기 위한 인공적인 '회귀의 여행'이 된다.
#'여기' 밖의 다른 곳에 대한 열망
그래서 타인의 세계는 단지 여행지일 뿐, 우리 삶과는 무관하다. 여행이 더욱 자극적인 것이 될수록 여행은 나의 삶과 타인의 삶을, 나의 세계와 타인의 세계를 끊임없이 분리시킨다. 우리는 모험심과 도전정신으로 타인의 세계에 침입하여 그들의 삶을 훔친다. 적나라하게 고백하면, 수없이 쏟아지는 오지 여행담, 여행책들이야말로 타인의 삶의 언저리에서 타인의 감수성을 훔쳐내어 우리의 상상력으로 적절히 버무려낸 이야기들이다. 나와 다르기 때문에 더욱 자극적인 이야기들은 트렌드에 맞게 더욱 스펙터클해지고, 나와 세계를 더욱 더 이질적인 것으로 분리시킨다.
여행의 시대는 어디까지 스펙터클해질 것인가. 우리는 언제쯤 은하철도999가 달리는 우주, 인어공주의 해저세계, 혹은 앨리스의 땅속 나라로 떠날 수 있을까.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얼마나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해줄까. 여행은 언제나 제자리로 돌아오기 위한 일상의 반복에 포획되고 마는 것이 아닌가. 역설적이게도 여행의 시대는 결코 끝나지 않는다. 일상이 지루할수록 우리는 더욱 여행에 중독되니까.
미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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