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필귀정] 차라리 엄살 부리는 게 낫다

입력 2010-03-25 10:49:45

최근 일본 정부 차원에서 한국 벤치마킹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그동안 상대로 여기지 않고 몇 수 낮춰봤던 한국이 반도체'조선'자동차'정보통신'원자력 등 각 분야에서 약진하자 예의 현미경 분석에 발동이 걸린 것이다. 다케미야식 '우주류' 바둑처럼 남이야 뭐라고 하든 자기 미학만을 고집하다 3류로 밀려난 일본 바둑과 마찬가지로 이제 일본 경제가 거칠지만 과단성 있는 한국의 '잡초' 경제를 눈여겨보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말 그대로 괄목상대(刮目相對)다.

그도 그럴 것이 장기적인 경제 침체에도 좀체 활력의 돌파구를 열지 못하는 사이 소니 등 전자업계가 삼성'LG와의 경쟁에 밀려 2류로 추락했고, 일본의 자존심으로 일컬어지던 도요타까지 대규모 리콜 사태로 휘청대고 있다. 게다가 미국을 누르고 30년 가까이 왕좌를 지켜온 공작 기계 분야마저 지난해 생산액 기준으로 중국'독일에 밀리면서 '기계 강국'의 콧대가 납작해진 상황이다. '위기'라는 파도가 거세게 몰아닥친 일본호를 보면서 일본 정부와 국민들이 조바심을 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니 최근 일본 경제산업성 공무원들이 우리 지식경제부를 방문해 중저가 제품 위주의 시장 개척 경험이나 원전 플랜트 수출 노하우를 집중적으로 묻고 심지어 경제산업성 산하에 '한국실' 설치 움직임까지 보이고 있다. 그런데 최경환 지식경제부 장관은 회의석상에서 "일본이 엄살을 떨고 있는 것"이라며 "우리가 일본을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다. 단단히 준비하고 긴장해야 한다"고 발언했다. 조금 잘나간다고 우쭐댈 필요도 없고 긴장감을 갖고 대비해야 한다는 소리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곤궁할 때 서둘러 현인을 찾아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천하를 제패했던 제 환공(桓公)의 고사에 비춰 볼 때 일본의 처신도 시의에 부합한다.

일본이 선진국 시장 즉 하이엔드(High-End) 제품에 있어서 기술력이 월등하고 시장 점유율도 앞서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처럼 속내는 그렇지 않으면서 짐짓 놀란 척하며 엄살 부릴 때 흔히 밉살스럽게 보이기 마련이지만 엄살을 마냥 부정적으로 볼 것만은 아니다. 상황을 오판하고 허세 부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백 배 실속 있는 처신이다. 정세 판단을 잘못하거나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일을 그르친 사례를 고금의 역사에서 흔히 접하지 않는가.

선조 24년(1591년) 3월 초순 어전회의에서 벌어진 일이다. 일본 사행(使行)을 마치고 돌아온 통신사가 조정에서 보고하는 자리였다. "가까운 시일 내에 반드시 병화(兵禍)가 닥칠 것입니다." 정사 황윤길은 말했다. 부사 겸 서장관이었던 허성도 "수길은 기필코 침공해 옵니다"고 거들었다. 그러나 부사 김성일은 다르게 말했다. "왜에는 그런 징후가 없습니다. 정사는 실없이 사실을 과장해 인심을 동요시키려고 합니다. 그의 말은 사실과 어긋날 뿐 아니라 옳은 일이 못 됩니다"라고 반박했다. 임금과 중신 모두가 반신반의했지만 결론은 왜침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쪽으로 매듭지어졌다. 아니 애써 외면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1년 후 숱한 민초들이 목숨을 잃었고 강토는 쑥대밭이 됐다.

상황과 처지가 위태로운데도 머리를 맞대고 당면 과제를 풀려 하지 않고 당파적 이해관계 때문에 안목이 흐려져 병화를 불러온 것이다. 이럴 경우 차라리 엄살 부리고 문제를 더 세밀히 들여다보는 게 순리인데도 말이다. 엄살은 문제를 직시하고 대처하려는 자세라도 갖추게 하지만 아집과 무지에서 비롯된 오판은 화를 키운다. 결국 엄살도 알아야 부리는 것이다. 어느 것이 더 무서운지는 말하나마나다.

어제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이 경영 일선 복귀를 발표하면서 말했다. "10년 내 삼성 대표 사업과 제품 모두 사라질 것이다. 지금이 위기다." 그의 말도 엄살에 가깝다. 하지만 조금씩 번져가고 있는 조직 내 위기감을 다잡고 머뭇거리지 말고 앞을 향해 나아가자는 채근이라는 점에서 손해 볼 것은 없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만함으로써 화를 자초하지 않는다고 했으니 때로는 엄살도 부리고 앞날을 도모하는 게 옳다.

徐琮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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