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암칼럼] 할머니의 마술

입력 2010-03-15 10:34:27

일본에는 '할머니 연구가'라는 전문직이 있다고 한다. 일종의 가족, 노부모 카운슬링 전문가다. '할머니의 노래'란 책도 지어낸 '히가 준코'라는 할머니 연구가가 그런 경우다. 그녀가 오키나와 나하 시(市)에 있는 '할머니의 길'이란 이름이 붙은 유명한 골목길을 찾아 할머니의 인생 지도(指導)법, 지혜 등 노년 여성의 삶에 대해 이런 말들을 했다.

'할머니란 직책에는 정년퇴직이 없다. 매달 조금씩 받는 노령(老齡)연금도 그냥 연금이라고 하지 않고 '교제(交際)연금'이라고 빗대 부른다.' 말하자면 손자, 며느리와의 유대와 교제를 위해 쓰는 비자금으로 활용한다는 뜻이다.

오키나와 할머니들은 대부분 웬만큼 아파도 병원을 잘 찾아가지 않는다. 평생 익히고 경험한 그 지방의 건강식품을 챙겨 먹으며 스스로 건강을 지킨다. 당초(唐草)라는 인기 건강식품을 살 때도 잎이 푸를 때 사다가 집에서 손질해 말려 쓴다. 싸게 먹히기 때문이다. 그런 근검절약의 실천을 무기로 입으로는 '불경기다'고 떠들면서 정작 슈퍼에 가면 마늘 하나까지 다 까서 봉지에 넣어 포장해둔 걸 사다 먹는 젊은 며느리들의 소비생활을 견제한다.

젊은 부부들이 출산을 꺼리는 추세에도 오키나와 할머니들은 '낳아라 낳아라'고 며느리들을 '공격'하며 다산(多産)을 독려한다. 젊은 며느리들이 누가 그 말 듣겠느냐 싶은데 그쪽 할머니들은 카리스마가 있다. 그냥 나이만 앞세우는 카리스마가 아니라 지혜와 경륜, 솔선수범에서 나오는 카리스마다. 가족 안에서 또는 지역 커뮤니티 안에서는 물론이고 필요하면 손자들의 세력까지도 할머니 편으로 끌어들여 우군(友軍)으로 만든 뒤 며느리 세대와의 파워게임 때 영향력을 동원하는 지혜다.

그 카리스마나 힘은 할머니의 베개 밑에서 나온다. 오키나와 할머니의 베개 밑에는 안 나오는 게 없다. 마치 알라딘의 등잔이나 보물섬 동굴 같은 곳이다. 종이에 싼 사탕, 휴지에 싸인 마른 삼겹살 등 온갖 것이 끝없이 나온다. '할머니 연구가' 히가 준코 여사는 그런 베개 밑 카리스마를 '할머니 마술'이라고 부른다. 웬만큼 나이가 들어도 펄펄 날아다닌다 할 만큼 철저한 건강 관리와 베개 밑 마술은 고학력 며느리 한두 명쯤 눈빛으로 부릴 만큼 영향력을 발휘한다.

준코 여사는 베개 밑 마술을 경제력으로도 보지만 보다 더 큰 카리스마의 원동력은 오랜 삶의 경험과 산전수전 다 겪은 연륜을 통해 축적한 지혜와 슬기라고 말한다. 집안일이나 직장 일에 문제가 생기고 벽에 부딪혔을 때 할머니가 하라는 대로 하면 틀림없이 잘 풀리거나 할머니에게 보고하면 반드시 해법이 나온다. 아직 세상을 덜 살아본 젊은 며느리나 딸들이 생각지도 못했던 삶의 지혜, 처세의 비결이 술술 나오는 것이다. 명문 대학 나온 내로라하는 며느리가 셋이나 돼도 할머니 한 명의 60평생 세상 풍파 속에서 얻어낸 지혜로움은 이길 수도, 따라갈 수도 없는 것이다.

한 예(例)로 할머니 연구가는 이런 사례를 들었다. 집안에 장애아가 태어났다고 했을 때 모든 가족이 침통해해도 할머니는 '축하할 일이다'며 가족을 단합시킨다. '하늘이 장애아를 준 것은 모든 가족이 합심해서 돌볼 대상을 줌으로써 그 장애아란 존재로 인해 가족을 일치시키고 뭉쳐 한마음이 되라는 계시'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할머니만이 생각할 수 있고 깨우쳐 줄 수 있는 지혜로움의 예다.

손자가 대학시험에 떨어져도 젊은 부모는 애타게 속을 끓이지만 할머니는 '단번에 붙으면 거만해진다'며 '괴로움'을 '좋은 경험'으로 바꿔내는 이상한 마술을 부릴 수 있다. 오키나와 할머니 연구가는 수많은 연구조사와 인터뷰를 통해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할머니가 지혜로울 때 그 집안은 슬기로운 가정이 된다.'

이 땅의 할머니들도 '그저 그런 할머니'가 아닌 '마술 부리는 할머니'로서의 카리스마를 지녀보자. 할머니 마술의 카리스마는 잔소리가 아닌 베개 밑 재력과 지혜로움에서 나온다.

김정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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