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아카데미상은 한동안 잊고 지내던 '여걸'이 여전히 건재함을 확인시켜준 계기가 되었다.
여성 감독 캐서린 비글로(59)이다. 그녀가 연출한 '허트 로커'(The Hurt Locker)가 제82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감독상 등 6개 부문을 석권했다. 1929년 아카데미상이 시작된 이래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는 영예도 안았다.
182㎝의 장신에 예순을 앞두고 있지만, 여전히 아름다움을 과시하는 그녀는 1980, 90년대만 하더라도 '남성적 액션영화'의 신예 감독으로 이름이 높았다. 뭇 남성들의 뺨을 치는 파워풀한 액션에 쇳덩이 맛처럼 강렬한 정서로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30년 가까운 감독 인생에 연출작은 10편에 불과하다. 가장 강력한 인상을 심어준 것이 제이미 리 커티스 주연의 '블루 스틸'(1990년)이란 작품이다. 연쇄살인마와 갓 경찰학교를 졸업한 여자 경관의 섬뜩한 멜로가 가슴을 졸이게 한 영화다. 권총의 묵직한 질감을 푸른 빛 조명으로 차갑게 그린 도입부부터 총격전 등 세련되면서도 강력한 이미지를 선사했다. 액션과 함께 연쇄살인마의 매력에 사로잡힌 여경의 베드신 등 상당한 액션과 함께 여성 특유의 섬세함까지 녹여 넣었다.
1991년 패트릭 스웨이지와 키아누 리브스 주연의 '폭풍속으로'는 범죄 영화이면서 홍콩 느와르처럼 남성적 우정까지 빛을 발하는, 당시 할리우드 영화로는 색다른 맛을 선사하기도 했다. 1995년작 '스트레인지 데이즈'는 전 남편이었던 제임스 카메론 감독이 제작과 각본을 맡아 당시 4천500만달러의 제작비를 투입한 SF영화였지만 흥행에는 참패했다. 세기말적 혼란상을 잘 그렸다는 극찬에도 난해한 스토리와 낯선 이미지들로 관객의 외면을 받았다. 이 바람에 한동안 영화계를 떠나기도 했다.
사실 그녀의 작품은 흥행면에서는 신통치 않았다. '폭풍속으로'가 2천400만달러 제작비를 들여 9천900만달러를 벌어들인 것이 최고 성적이었다. 1억달러의 제작비를 들인 해리슨 포드 주연의 잠수함 영화 'K-19'도 6천만달러를 버는 데 그쳤다.
지난해 6월 이미 미국에서 개봉된 '허트 로커' 역시 1천470만달러로 손익분기점을 넘지 못했다. '허트 로커'는 이라크전에서 활약하는 미 육군 폭발물 처리반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폭발물 사고로 선임자가 죽고 윌리엄 제임스(제레미 레너) 하사가 새로운 팀장으로 온다. 폭탄 제거에서 희열을 느끼며 삶의 의미를 찾는 윌리엄은 자신의 실력을 믿고 독단적으로 행동하며 팀원들과 갈등을 만든다.
삶과 죽음의 칼날 위에서 하루를 버티는 이들은 언제 죽을지 모를 공포 속에서 서서히 서로를 증오하기 시작한다. 비글로 감독은 참전 군인들의 공포와 긴장을 재깍거리는 시한폭탄 위에 얹어놓고 섬세하게 그리고 있다. 특히 포탄이 폭발하는 장면 등은 바로 옆에서 목격하는 것처럼 사실적이고 육중하게 그려냈다.
올해 전미비평가협회 최우수 작품상과 감독상 등을 시작으로 이번 아카데미 수상까지 세계 유수 시상식에서 모두 76개의 상을 받았다.
그러나 '허트 로커'를 국내에서 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통상적으로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을 수상하면 '특수'를 노린다. 지난해 아카데미 8관왕을 차지한 '슬럼독 밀리어네어'가 아카데미 직후 국내에 개봉해 100만 관객을 돌파하며 화제를 모았고,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케이트 윈슬렛 주연의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 역시 '아카데미 후광'을 입었다.
그러나 '허트 로커'는 다소 암울한 편이다. 미국 내 흥행도 별로였지만, 이미 미국에서 DVD가 출시되는 바람에 개봉 효과가 약할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허트 로커'와 함께 올해는 아카데미 특수가 '실종'될 공산이 크다. 현재 상영 중인 영화로는 남우주연상과 주제가상을 배출한 '크레이지 하트'(4일 개봉)와 시각효과상을 비롯해 촬영상, 미술상 등 3관왕을 차지한 '아바타'뿐이다.
데뷔 후 첫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건재를 알린 샌드라 블록의 '블라인드 사이드', 여우조연상과 각색상을 안은 '프레셔스' 등은 아직 개봉 여부조차 알려지지 않은 상황이다.
'블라인드 사이드'는 미식축구 스타 마이클 오어의 실화를 다룬 마이클 루이스의 2006년산 베스트셀러 '블라인드 사이드:게임의 진화'를 대형 스크린으로 그려낸 스포츠 휴먼 드라마. '프레셔스'는 흑인 여성 작가 사파이어(본명 라모나 로프톤)가 1996년에 내놓은 소설 '푸쉬'(Push)를 영화화한 성장 영화로 지난해 선댄스 영화제에서 처음 소개되어, 심사위원 대상과 심사위원 특별상(엄마 역의 모니끄), 관객상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미국 영화의 상업적 성과를 한 자리에 올려놓는 아카데미상이 올해는 비상업적인 독립성 짙은 영화를 골랐다"는 평가와 함께 올해 아카데미는 극장가에서도 소외되는 특이한 이력을 남기게 되었다.
김중기 객원기자 filmto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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