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흥의 책과 예술] 현장은 역사다

입력 2010-03-10 07:34:44

정문태 지음/asia푸른숲 펴냄/1만7천원

누구에게나 잊을 수 없는 기억이란 것이 있다. 특히 어린 날에 겪었던 사건은 평생 자신이 가야 할 길을 결정짓게 되기도 한다.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갓 부임한 담임 여선생님은 유난히 가난했던 아이들에게 늘 따뜻한 시선을 주셨고 아이들은 그 선생님을 무척이나 따랐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의 책상 서랍 안에 모아 두던 불우이웃 돕기 성금이 없어진 사건이 일어났다. 절망한 선생님은 모든 아이들을 면담하고서도 범인(?)을 찾지 못하자 거의 일주일간 수업을 하지 않고 매시간 눈을 감고 책상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거나 의자를 들고 있는 벌을 주셨다. 아이들은 행여 눈을 뜨거나 의자를 내리게 되면 범인이 될까봐 벌을 받는 내내 불안에 휩싸여 서로를 의심하게 되었다. 급기야 선생님도 아이들도 모두 지쳐 눈물을 흘리게 되었고 선생님의 눈물을 견디지 못한 한 아이가 자신이 그 돈을 훔쳤노라고 고백을 하고 말았다. 운동장의 목련이 봄비에 순식간에 지듯이 선생님의 사랑은 그렇게 사라져 버렸고 그 아이는 언젠가 나이가 들면 진실을 말할 날이 오리라 생각했지만 쉰의 나이가 다 되도록 그 시간은 오지 않았다. 글을 쓰겠다는 생각도,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만들겠노라는 젊은 날의 생각도, 아니 어쩌면 지금 하고 있는 일조차도 세상의 작은 헌신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그날의 기억에 빚지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언젠가 선생님을 만나게 되면 그때의 그 고백은 동무들과 선생님의 눈물이 너무 아파서 한 거짓이었노라고 말하고 싶었다. 이토록 오랜 시간 원죄로 맴돌았던 사십여년 전의 그 거짓 고백을 다시 떠올린 것은 정문태 기자의 『현장은 역사다』 때문이었다.

"아시아의 슬픔과 기쁨, 아시아의 분노와 용서, 아시아의 절망과 희망, 아시아의 어제와 오늘, 그 아시아 현대사의 현장으로 되돌아가고 싶다. 아시아의 역사를 두루 고민해온 이들과 함께, 그렇게 아시아를 안고 가자고, 아시아 시민사회의 한 울로" 그가 '어리석은 고민 끝에' 썼다는 머리말은 20년 동안 국제 뉴스 현장에서 역사를 기록해 오면서 진정한 역사가 무엇인지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우리 사회에서 전선(戰線)기자라는 흔하지 않은 직함을 가지고 있는 작가는 이 책에서 대통령에서 게릴라까지 총알이 빗발치는 전선에서 감옥까지 변방으로 치부되고 있는 인도네시아(Indo

nesia)와 아쩨(Aceh), 그리고 동티모르(East Timor), 버마(Burma)와 캄보디아(Cambodia), 말레이시아(Malaysia), 타일랜드(Thailand)를 기록한다. 또한 그 기록은 음모와 변절로 점철되고 실종되어버린 부끄러운 우리 역사와 닮아 있다. 특히 버마 민주화의 상징인 아웅산 수치와의 인터뷰는 우상과 혁명이 공존할 수 없는 이유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또한 오늘 이 순간까지 킬링필드를 두고 캄보디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국제사회의 분탕질과 크메르루즈(Khmer Rouge)의 흥정판은 좌와 우가 공히 역사 앞에 변명으로 내세우는 인민이 실제로 받고 있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정치의 계절이 오고 있다. 정치인들 모두가 국민과 함께하겠노라고 말한다. 과연 우리에게 현장이 역사로 기록될 날은 올 것인가.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선생님께 오래된 진실을 말씀드리고 싶다.

여행작가 ㈜미래티엔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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