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0 광장] 걷고 싶은 도시와 살고 싶은 도시

입력 2010-03-09 10:57:23

도시를 다니다 보면 그 도시가 표방하는 전략이 곳곳에 걸려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기업인을 왕으로 모시겠다'라는 자극적인 표어부터 살기 좋은 도시, 기업 하기 좋은 도시, 문화가 있는 도시, 첨단 과학도시, 교육 도시, 행복한 도시까지 어느 지역이나 표방하는 구호가 비슷하다. 대구나 경북도 예외가 아니다. 표방하는 표어가 비슷할 수밖에 없는 것은 각 지역이 궁극적으로는 시민들이 행복한 도시를 만들고 싶다는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어떤 도시라야 시민들이 행복해할까?

'걷고 싶은 도시라야 살고 싶은 도시다'

한국 도시계획학계의 제1세대로 불리는 고 강병기 선생의 유고집 제목이다. 책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살기 좋은 도시보다 살고 싶은 도시를 도시의 이상향으로 표현하고 있다. 살기 좋은 도시가 영양학적으로 흠잡을 데 없는 '보기 좋은 밥상'이라면 살고 싶은 도시는 외부에서 평가하기엔 부족할 수도 있지만 살고 있는 이들이 만족하는 '맛있는 밥상'이다. 아무리 도로가 잘 닦여 있고 교육 여건이 훌륭한 살기 좋은 도시라고 해도 이웃의 정이 없다면 어쩔 수 없이 살아야 하는 도시에 불과하다. 반면에 살고 싶은 도시는 살고 있는 지역 주민들이 떠나고 싶지 않은 도시다.

살고 싶은 도시의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내세우는 것이 걷고 싶은 도시다. 걷고 싶은 도시는 자동차 중심이 아니라 보행자 중심의 도시로 자동차로 인한 지구 온난화 문제에도 대응할 수 있다. 현 정부의 녹색 기조에도 맞는다는 얘기다. 그리고 사회적 취약 계층에게도 적합한 방식이다. 장애인은 물론이고 고령화되어가는 현실을 고려한다면 건강 증진을 위해서도 걷기 좋은 도시는 제 역할을 할 수 있다. 또한 사람이 찾아오는 도시이기도 하다. 서울에서 외국인이 가장 많이 찾는 공간 중 하나가 인사동 골목이다. 도시를 찾는 사람들은 거대한 건축물이나 넓은 도로보다 세심하게 배려된, 다양한 즐길 거리가 있는 즐거운 도시 공간을 좋아한다. 걷기 좋은 도시에서는 이웃과 소통하는 마을 중심의 문화도 싹틀 수 있다. 그러면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는 어떠한가?

대구도 자동차 중심에서 사람 중심으로 교통 정책을 변화시켜 나갈 것이라고 얘기한다. 하지만 이러한 교통 정책이 도시 정책의 중심이 아니라 곁가지 정도인 것 같다. 중심은 역시 기업 유치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기업을 유치해서 경제를 살려야 살기 좋아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기업만 유치한다고 도시가 살기 좋아지고 시민들이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누구를 위한 도시인지, 어떤 도시인지에 대한 비전이 있어야 한다.

필자가 활동하고 있는 단체를 비롯해 대구지역의 여러 단체들이 몇 년 전부터 한일극장 앞에 횡단보도를 설치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한일극장 앞 횡단보도보다 더 중요한 곳이 많다는 얘기도 하고, 횡단보도 하나에 왜 그리 목숨을 거느냐는 얘기도 한다. 지하상가 상인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다.

그런데 필자의 생각으로는 한일극장 앞은 대구지역의 상징적인 공간이다. 대구 시민이 가장 많이 찾는 공간이다. 이곳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대구의 미래 도시 계획에 대한 비전을 보여주는 것이다. 반발까지도 무시하자는 것이 아니라 한일극장 앞 횡단보도 논의를 통해 대구의 도시 비전을 만들어 가자는 것이다. 대구 1호로 건설된 신암육교도 철거 문제로 시끄럽더니 결국 제자리걸음이다. 이해 당사자들의 충돌하는 이야기들을 조율하고 해결책을 제시해야 하는 지방 정부가 제 기능을 못하고 있다. 육교나 지하도도 시민의 안전을 위해 처음에는 계획적으로 만든 시설물들이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면 그 존재 이유도 변하게 된다. 도시의 주인이 걷는 사람이고 자동차가 사람을 두려워한다면 이런 시설물은 굳이 필요 없다.

다양하게 충돌하는 삶의 공간에 대해 토론과 합의점을 찾아 나가는 과정이 중요하다. 결론을 내지 않는 것이 일면 가장 편해 보일 수 있지만 도시는 그만큼 정체된다. 보행자 우선기준을 가지고 대구의 도시 비전을 토론해 가길 간절히 바라본다. 기업의 유치만을 바라는 도시가 아니라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며 웃을 수 있는 행복한 도시를 희망한다.

안재홍 대구녹색소비자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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