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눈 밖에 나면 '심판'은 시작된다
지난달 25일 오전 퍼시픽 콜리세움에서 열린 밴쿠버동계올림픽 여자쇼트트랙 3000m 계주에서 한국팀(조해리·이은별·김민정·박승희)이 1위로 골인했다. 감격에 찬 선수들은 태극기를 들고 경기장을 돌며 우승의 감격을 만끽했다. 계주에서 동계올림픽 5연패라는 금자탑을 이룬 기쁨에 선수들은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잠시 후 선수들이 흘린 눈물은 슬픔의 눈물로 바뀌었다. 심판의 석연찮은 판정으로 실격 처리되면서 2위로 들어온 중국팀에게 1위가 돌아갔기 때문이다.
금메달을 빼앗긴 선수들은 물론 고국에서 경기를 지켜보던 국민들은 분통을 터뜨렸다. 애매한 판정으로 대한민국 국민들의 공공의 적이 된 장본인은 호주 출신의 심판 제임스 휴이시였다. 몇 시간 후 국민들의 정서를 반영하듯 휴이시 심판에 대해 일명 '네티즌수사대'의 심판(?)이 시작됐다. 그날 오후 '가학수사대'로 알려진 네티즌수사대에 의해 휴이시 심판의 집주소와 이메일, 전화번호 등 개인정보가 인터넷에 공개됐다. 그를 성토하는 게시물도 봇물처럼 쏟아졌다. 한 네티즌은 휴이시 심판이 한국 선수에 대해 내린 7건의 실격 사례를 정리해 올리기도 했다.
한국 네티즌들의 정보수집 능력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다. 그동안 네티즌수사대가 세간의 주목을 받은 것은 한두번이 아니었다. 특히 대중들의 관심을 받는 연예인의 경우 네티즌수사대의 집중 표적이 됐다. 권상우·손태영, 김남일·김보민 커플의 열애를 밝힌 것도 네티즌수사대다. 김남일·김보민 커플은 열애설을 부인하다 네티즌수사대가 커플링, 커플 모자 등을 공개하자 사실을 인정했다. 포털사이트에 올라오는 화제의 중심에는 거의 예외없이 네티즌수사대가 있다.
◆그들은 누구
네티즌수사대는 'NCSI' 또는 'NSI'로도 불린다. 미국과학수사대의 활약을 다룬 드라마 CSI에서 착안한 이름이다. 네티즌수사대는 인터넷에 떠도는 많은 정보 가운데 특정 사건이나 인물에 관한 것을 찾아내 제공하는 집단을 말한다. 검색을 하거나 각종 게시판으로 정보를 나르는 사람 등 인터넷을 하는 불특정 다수로 구성돼 있다. 특정 사안이 불거졌을 때 이합집산할 뿐 상시적으로 활동하는 연합체는 아니다. 하지만 네티즌수사대라는 이름을 내걸고 활동하는 인터넷 카페도 있다. 사이버공간에서 네티즌수사대로 통하는 이들의 오프라인 직업은 다양하다. 초·중·고등학생과 대학생을 비롯해 취업준비생, 직장인 등이 망라돼 있다.
◆정보수집 방법
네티즌수사대의 정보력은 우스갯소리로 '경찰보다 더 과학적이고 CSI보다 더 대단하다'고 한다. 그러면 어떤 방법으로 단시간에 개인정보까지 알아내는 것일까. 이를 취재하기 위해 네티즌수사대 인터넷 카페에 글과 기자의 전화번호를 남긴 뒤 접촉을 시도했으나 며칠 동안 묵묵부답이었다. 어쩔 수 없이 포털사이트 운영진, '반크', 경찰 사이버수사대 등 네티즌수사대와 관련된 사람들을 통해 정보수집 방법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에 따르면 네티즌수사대의 정보력은 한마디로 협업과 분업의 결과물이다. 수많은 네티즌이 하나씩 내놓은 정보들이 합쳐져 하나의 자료가 완성된다는 점에서 협업이다. 하지만 정보를 모으는 방식은 분업화돼 있다. 사진을 잘 찾는 사람, 모자이크를 잘 지우는 사람 등이 각개전투를 벌여 필요한 정보를 모은다는 것.
방법은 다양하다. 가장 많이 사용되는 것은 검색이다. 특히 구글 검색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는 '구글링'은 애용되는 방법 중 하나. 구글에는 국내정보뿐 아니라 해외정보도 많아 한국을 대표하는 사이버외교사절단인 '반크'도 구글링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 휴이시 심판의 개인정보도 구글링을 통해 수집된 것으로 알려졌다. 검색의 경우 여러 개의 포털사이트 창을 띄워 놓은 뒤 가능한 모든 연관어를 입력해야 하기 때문에 몇 시간씩 웹페이지를 검색하는 근성과 인내심이 필요하다.
또 특정 사건과 관련된 주변 인물들이 결정적인 정보를 제공하기도 하며, 때로는 해킹이라는 극단적 방법도 동원된다고 한다. 개인 정보를 수집할 때는 특정 인물이 자주 찾는 웹페이지 방문 흔적을 추적하기도 한다. 이렇게 모인 정보들이 한곳에 모여 하나의 그림이 완성되면 일반 네티즌들의 활약이 시작된다. 확대 재생산을 위해 각기 다른 게시판으로 정보를 실어 나르는 일은 일반 네티즌들의 몫이다.
◆넓어지는 수사 대상
과거 연예인들에게 국한되었던 네티즌수사대의 활동 영역이 점차 확대되고 있다. 2005년 지하철에서 애완견 변을 치우지 않아 눈살을 찌푸리게 한 '개똥녀' 사건 이후 추적 대상 범주에 일반인들이 본격적으로 포함되기 시작했다. 최근 벌어진 고등학생의 교사 성추행 사건, 해부용 시체로 장난친 사건을 비롯해 아동 성폭행범 조두순의 과거가 네티즌 검색을 통해 공개됐다. 또 지난해 키 작은 남자에 대한 비하발언으로 '루저녀'로 불린 한 여대생은 네티즌수사대에 의해 개인정보가 고스란히 밝혀졌다.
◆명(明)과 암(暗)
네티즌수사대를 보는 시각은 엇갈리고 있다. 순기능에 주목하는 사람들은 네티즌수사대가 알권리를 충족해 준다는 입장이다. 한 네티즌은 "네티즌수사대를 통해 궁금증을 해결한 적이 많다. 알권리를 충족시켜 주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어느 정도의 부작용은 감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포털사이트 한 관계자는 "역기능도 있지만 순기능도 많기 때문에 이를 활성화시키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올바른 인터넷 문화 정착을 위해 댓글과 사진을 올릴 때 한번쯤 당사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반론도 만만치 않다. 포털사이트가 실시간 모니터링을 통해 부적절한 정보를 걸러내고 있지만 인터넷에 떠도는 악성루머, 악성댓글로 인한 피해가 속출하고 있으며 사건과 무관한 사생활까지 낱낱이 파헤쳐지는 것은 문제로 심각한 지적된다. 배우 신하균은 마약 복용 혐의자로 지목돼 곤혹을 치렀으며, 주민등록번호 유출과 해킹 때문에 연예인들이 네티즌을 고소한 사건도 여럿 있었다. 또 연예인과 동명이인의 시민들이 덩달아 피해를 입은 경우도 적잖았다.
이 때문에 파급 효과에 비해 책임이 가볍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대구지방경찰청 사이버수사대 관계자는 "피해 당사자의 고소·고발 없이도 인터넷에서의 부적절한 정보 유출에 대한 수사가 진행될 수 있으며 사안에 따라 명예훼손, 폭력 등의 혐의가 적용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정보의 양이 워낙 방대해 단속에 한계가 있으며 실제 처벌받는 경우도 드문 것이 현실이다.
한 네티즌은 "네티즌수사대가 면죄부를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잘못된 정보 하나가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다. 남의 얘기를 너무 쉽게 하는데 강력한 제재 수단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밝혔다.
이경달기자 sara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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