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야기] 봄비

입력 2010-03-06 07:39:05

우산 속 첫사랑의 추억에 괜스레 콧잔등이 시큰

생활의 발견, 작은 감동 등 살아가면서 겪은 경험이나 모임, 행사, 자랑할 일, 주위의 아름다운 이야기, 그리고 사랑을 고백할 일이 있으시면 원고지 3~5매 정도의 분량으로 사진과 함께 보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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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내실 곳=매일신문 문화부 살아가는 이야기 담당자 앞, 또는 weekend@msnet.co.kr

지난주 당첨자=김창희(대구 수성구 범어3동)

다음 주 글감은 '주말부부'입니다.

♥눈발은 기꺼이 눈물로 바뀌어

겨울의 끝자락에서 어느 순간 느껴보는 봄의 촉촉함. 단비가 내렸다. 후들거리는 마라톤 주자의 힘겨움처럼 매섭던 추위가 제풀에 지칠 때면 흩날릴 것 같았던 눈발은 기꺼이 눈물로 바뀌어 내린다. 유난히 비가 적었던 지난해와 달리 올해는 제법 어깨를 펴듯 비가 내리는 날이 많아졌다. 겨우내 눈이 많이 내리면 그해엔 비 또한 많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우연히 베란다에서 마주친 비오는 날의 습기가 내 마음을 착 가라앉히더니 점점이 동그랑땡을 치는 고인 낙숫물사이로 옛 추억 한 자락이 퍼져 나온다. 턱을 괴고 잠시 그 속으로 빠져든다. 아련한 추억 속의 첫사랑, 그녀. 봄비 내리던 캠퍼스 오솔길을 걸으며 떨리는 손으로 슬며시 웃옷을 벗어 그녀의 어깨 위에 걸쳐도 주었고, 바래다준 그녀의 집 앞 우산 속에서 서로 먼저 돌아가기를 고집하며 버스정류장을 몇 번씩이나 왕복했던 그때를. 삼십년이 훌쩍 지난 지금, 그녀도 그날의 봄비를 기억하고 있을까? 먼 이국땅에서 말이다. 객지에서 첫 직장 생활을 하던 4월 어느 비 오던 밤, 하숙집으로 불쑥 찾아왔던 친구와 나누던 막걸리 한잔과 밤새 똑똑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얘기꽃을 피우던 친구와의 먼 기억도, 잠시 실직의 아픔을 겪을 무렵 무작정 이사를 떠나야 했던 그 절박했던 봄비 내리던 3월 어느 날의 기억도, 축 처진 내 온 몸으로 스며들어 마음까지 적셔놓던 봄비는 상처처럼 내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어느 누군들 사연 없는 사람이 있겠냐마는 괜스레 옛 추억에 콧잔등이 시큰해지면 의미 없이 내리는 비에도 사연을 부여하는 게 우리의 마음인가 보다. 그래도 싫증나지 않는 게 추억 되새김질이 아니던가. 이즈음 내리는 봄비는 첫 단추부터 유난히 그런 추억과 상처를 꿰맞추어 준다. 어쩌면 갈증처럼 오래 기다린 탓인지도 모른다. 탁한 대기오염이 빗물 속에, 산에도 들에도, 들뜬 고사리 손의 초등학교 신입생들이 밟을 학교 운동장에도, 또한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에도 그 봄비의 촉촉함이 스며들었으면. 봄은 그렇게 봄비와 함께 오고 있었다.

서웅교(대구 수성구 범어4동)

♥시장통에 나올 봄나물 기대에 들떠

봄비가 잦다. 몇 차례 봄비가 내리더니 시장 통이 봄나물들로 가득하다. 올 겨울 유난히 동장군이 기세를 떨쳤는데 어디서 봄나물이 이렇게 자랐나 싶어 기특하고 신통방통하다.

나는 비를 무척 좋아한다. 유년 시절에 이런 나를 보고 어른들은 청승을 떤다고 나무라셨지만 중년이 된 지금도 하염없이 빗소리를 사랑한다. 겨울 찬비도 분위기가 있어 좋고 여름 소나기는 시원해서 좋고 가을비는 가슴을 후비는 것 같아 더 애잔하고 봄비는 따스함을 불러와서 더더욱 고맙다.

봄비 소리에 기분이 들떠 시장 바구니를 챙겨 나와 봤다. 촌 아낙네들의 부지런함이 몸소 느껴졌다. 소쿠리 가득 냉이, 달래, 씀바귀, 봄동이 구미를 당기게 했다. 수일 내 비 오는 오후에 마음이 통하는 친구들을 불러 모아 소담한 얘기도 나누며 토속적인 음식으로 조촐한 모임을 갖고 싶다. 봄나물로 새콤달콤하게 조물조물 무쳐 한상 가득 차리고 직접 띄운 맛난 청국장으로 한껏 솜씨 자랑을 뽐내야겠다.

친구들아~ 연락하면 다 올 거지? 새로 단장한 정원에서 봄비에 걸맞은 음악도 듣고 한소쿰 가득 봄 비빔밥을 나눠먹고 민트 차 곁들이며 우리 실컷 웃어보자. 봄비 오는 날 연락하마. 꼭 와!

윤선주(대구 달서구 신당동)

♥팔십줄이지만 장화신은 발걸음 거뜬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부농의 꿈을 안고 고향 지킴이로 산 지도 어언 팔십 줄이 됐다. 언제나 남들보다 더 부지런하게 움직이는 덕에 풍족하지 않아도 골고루 나눠줄 양식이 있어 마냥 행복하다. 부모 마음에 하나라도 더 챙겨줄라치면 자식들은 나이를 생각해서라도 조용히 쉬라며 성화이지만 아직도 힘이 넘치는 기력이 있어 오늘도 기분이 좋다.

대보름 작은 마을이 시끌벅적하다. 아침부터 마을 주민들이 귀밝이술로 정을 나누며 풍악을 울리느라 사람 사는 냄새가 모처럼 물씬 났다. 보름달이 뜨자 풍년과 안녕을 기원하는 달집 태우기가 시작되고 소원과 덕담을 빌며 정을 냈다. 달무리가 지는 걸 보니 올해도 영락없이 풍년이 깃들 조짐이 보인다.

밤새 봄비가 내렸다. 굳고 싸늘한 대지에 반가운 빗님이 천지를 폭신하게 적셔 놨다. 아침 일찍 겨우내 삭힌 거름을 논·밭에 뿌리고 늙은 농부의 자존심을 힘차게 발휘해 본다. 텃밭에 비닐을 덮어둔 푸성귀들도 제법 싱그럽다. 아침상 물리고 한 줌 뜯어 마을 입성 친절하고 문턱이 낮은 신협 아가씨들한테 한줌 갖다 주어야겠다. 장화를 신은 발걸음이 한결 빨라진다. 앞으로 소일거리로 생각하며 20년은 거뜬히 농사꾼으로 더 살고 싶다.

김필규(대구 달성군 하빈면)

♥공짜 영화에 혼쭐···나와선 비에 생쥐꼴

간밤에 대지를 촉촉이 적시는 봄비가 곤히 잠든 날 깨워놓고 지금까지 내리고 있다.

잠이 안와 뒤척이다 보니 2년 전, 봄비에 흠뻑 젖은 날이 생각났다.

왕언니들과의 점심 모임에 서둘러 나가면서 하늘을 보니 물먹은 솜이불처럼 무겁게 내려 앉아 있었다. 그래도 낮에 비가 내린다는 예보가 없었기에 간단한 소지품만 챙겨 약속 장소로 갔다. 부지런한 왕언니들은 벌써 도착해 자주 접할 수 없는 뷔페를 실컷 먹기 위해 아침도 조금 먹었다며 접시를 들고 분주하게 오갔다.

실컷 먹고 떠들다가 헤어지려는데 왕언니 한 사람이 공짜 영화표가 있다면서 영화 보러 가자는 제안을 했다. 오후 2시. 집으로 가기엔 이른 시간이라 망설이다 영화관으로 향했다.

오후 3시. 영화관에 도착했고 한 시간을 더 기다린 오후 4시. 영화시작 시간을 기다리는데 갑자기 영화관에 불이 환하게 켜지는 것이었다. 무슨 일인가 해서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신사 한 분이 나타나더니 공짜 영화를 상영하기 전에 잠시 설명을 하고 영화를 본다고 했다.

난 그때 알았다. 관혼상제에 관한 설명을 듣고 영화를 봤다는 동네 아주머니들 넋두리의 주인공이 내가 되었다는 것을. 영화표라도 확인할 걸 후회해봤자 소용이 없었다. 혼자 간다고 나서려니 언니들이 미안해 할 것 같고 참고 설명을 듣자니 너무 지루했다. 1시간 30분의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오후 6시 30분 겨우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영화는 시작되었지만 아이들 걱정, 저녁 걱정에 일단 큰아이한테 문자를 보냈다. '엄마 볼 일이 있어 좀 늦어. 자세한 것은 집에 가서 말해 줄 테니 아빠랑 저녁 시켜서 먹어.'

오후 8시 30분. 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3월 봄비가 제법 내리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봐도 우산 파는 곳이 보이지 않아 언니들이랑 비를 맞으며 뿔뿔이 헤어졌다.

오후 9시 20분. 난 물에 빠진 새앙쥐가 되어 돈으로 저녁을 해결하는 가족들 앞에 나타날 수 있었다.

박정연(대구 남구 대명3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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