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작품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송아당 박춘자 대표

입력 2010-03-05 08:04:05

1982년 40대 초반 여인이 택시에서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친구의 암 투병 소식 때문이다. 한참 울던 그는 목적지인 서울 인사동에 도착했고, 다음 손님이 기다리고 있어 서둘러 요금을 내고 택시에서 내렸다. 한참을 가다 보니 손이 허전했다. 달력에 곱게 싸둔 겸재 정선의 그림을 택시에 두고 내린 것을 깨달은 것. 그때 잃어버린 겸재의 그림은 당시 500만원. 지금으로 치자면 억대를 호가할 만한 그림이었다.

송아당 화랑 박춘자(70) 사장의 이야기다. 올해로 화랑 개관 30년째를 맞은 그는 1980년대 고서화로 화랑을 처음 시작해 1990년 현대 회화로 장르를 바꾸면서 대구 화랑의 역사를 써왔다. 처음 화랑을 시작할 당시만 해도 맥향 화랑, 동원 화랑 등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된 화랑이 없던 시절이었다. "아버지는 야구, 경마를 즐기는 멋쟁이셨어요. 수시로 그림을 바꾸어 걸던 아버지의 영향이 컸죠. 저 역시 어릴 때부터 문학, 영화, 음악, 미술 등 예능에 관심이 많았고요."

남편을 먼저 여의고 친구들조차 떳떳하게 만나지 못하던 시절, 그는 서예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고서화에 취미를 갖기 시작했다. 당시엔 그림과 골동품을 겸해 판매하던 화랑이 제법 많았다. 고서화는 하면 할수록 빠져드는 매력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그리운 시절이에요. 겸재 정선, 단원의 풍속화, 이당 김은호 등의 작품을 직접 만져볼 수 있었으니까요. 요즘 같으면 겸재 선생의 그림을 볼 수나 있겠어요. 좋은 작품을 만지는 것만으로도 큰 보람이었죠." 고서화를 다루기 위해선 공부가 필수. 그는 그 시절을 '참 열심히 살아왔다'고 회상한다.

1990년 송아당은 현대의 구상 회화 작품을 주로 취급하는 화랑으로 거듭났다. 고서화가 자취를 감추던 시점이다. 주변에선 '돈이 안 된다'며 말렸지만 앞으로 미술 시장에서 살아나려면 현대 회화 미술시장을 개척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말처럼 쉽지만은 않았다.

"시장이 형성되지도 않았지, 작가와 고객 사이에서 스트레스 받는 일이 만만치 않았어요. 그래도 뭐든 겁없이 했어요. 진품 감별하러 밤잠 설치며 서울을 오가기도 했죠."

여자 혼자 몸으로 화랑을 운영하다 보니 특유의 결벽증도 생겼다. 고객이든, 작가든, 기자든 같이 밥 한번 먹는 일이 없었다. 그것만은 철칙으로 지켰다. 딱딱하다는 얘기도 들어야 했다. 이 원칙은 15년 전 딸 이정원(42)씨가 화랑 일에 뛰어들면서 스스로 깼다. 세상의 시선에서 서서히 긴장을 풀기 시작한 것. 현재 딸 이씨는 어머니의 뒤를 이어 서울에서 '갤러리 송아당'을 운영하고 있다.

송아당은 이수동 등 전속 작가를 키우기도 하는 뚜렷한 색깔을 지녔다. 다른 사람들이 질투할 정도로 화랑과 작가와의 의리를 서로 챙긴다. 젊은 작가라도 한번 결정하면 확실하게 작가를 키워줬다. 물론 상처받은 적도 있지만 그는 그것을 큰 자랑으로 여긴다. '송아당 화랑에서 사면 가짜가 없다', '누구는 송아당에서만 전시하는 작가'라는 말이 그냥 나온 건 아니다.

"작가를 선정할 때 가장 먼저 사람을 봐요. 어차피 사람이 누리는 게 예술이니까, 사람의 진정성은 통하기 마련이죠." 그가 찜한 작가 중 전국구 작가로 성장한 작가가 많다. 작품을 보는 연륜이 있는 만큼 작가들에게 작품의 조언을 하기도 한다. 이왈종, 운보 김기창 등 유명 작가의 전시도 했다.

그는 올해 전시에 모두 '개관 30주년 기념전'이라 이름 붙인다. 모두들 송아당과의 인연이 각별한 작가들이다. 현대 미술 작품으로 전환한 후 초창기에 전시했던 작가, 송아당을 발판으로 전국구 스타로 성장한 작가가 포함된다. 3월엔 김영대, 4월 주태석, 5월 김영식, 6월 이두식, 7월 양준호, 9월 장이규, 10월 이수동, 11월 박해동 등의 전시회가 잡혀 있다.

2008년 수필가로도 등단한 그는 조만간 30주년 역사를 정리해 책을 낼 계획이다. 원없이 미술시장을 헤쳐왔던 그에게도 남은 한이 있을까?

"제일 좋아하는 작가인 권옥연 선생의 전시를 못해 본 게 한이라면 한이랄까. 나머지는 없어요. 건강이 허락하는 한 송아당을 지킬 계획입니다."

최세정기자 beacon@msnet.co.kr

사진·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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