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시대] (2)기차여행과 풍경

입력 2010-03-04 15:00:43

풍경은 단지 바라볼 수만 있을뿐

나의 스무 살에, 그와 그녀는 기차를 타고 왔다. 당시 전 세계 스무 살들의 가슴에 로망을 끓인 영화 의 두 주인공, 미국 남자 제시와 프랑스 여자 셀린느는 비엔나행 기차에서 우연히 만난다. 지구 저편의 남녀가 낯선 곳에서 어느 날 갑자기 사랑에 빠질 수 있는 로망의 공간이 바로 달리는 기차 안이다.

그 시절 우리들은 기차여행의 낭만에 몸살을 앓았다. 너도나도 유럽으로 기차를 타기 위해 날아갔다. 나는 이십대의 막바지에야 겨우 어느 여름 기차를 타고 비엔나로 갔다. 기차 안 옆 자리에서 잘 생긴 외국 청년과 눈빛을 나누는 대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유럽 사람들이 여름휴가를 떠난 유럽은 텅 비어 있었고 기차 안은 한국 사람, 일본 사람, 중국 사람들이 빽빽했다. 하지만 나는 낭만을 포기하지 않았다. 기차가 데려다 준 비엔나에서 영화가 촬영됐던 장소를 찾아다니며 마치 그와 그녀가 지금도 여전히 비엔나에서 사랑에 빠져있는 환상을 더듬었다. 그와 그녀가 첫키스를 한 플라터 놀이동산, 점성술사 할머니를 만났던 슈테판성당 뒷골목의 노천카페, 거리의 시인을 만났던 도나우강변의 산책로…. 비엔나 여행은 기차의 정차역들처럼 예정된 장소를 순서대로 거쳐 간다. 이렇게 여행의 임무는 완수된다.

기차를 타고 여행을 한다는 것은 뭘까. 그것은 나의 시간대를 탈주하여 미지의 시간대로 진입하는 것이다. 전혀 다른 시간대의 삶을 살고 있는 낯선 사람들 속으로 순간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것, 그것이 기차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기차가 처음 등장한 건 불과 백여 년 전이란 사실이 놀랍지 않은가. 미투리 몇 켤레 꿰차고 산 넘고 물 건너 몇날며칠 한양 가던 시대, 이웃마을에 한 번 가려 해도 구불구불 고개를 넘다가 산짐승도 만나고 산도적도 만나던 시대에 기차는 참으로 기이한 물건이었다. 찰나의 순간에 이웃마을에, 심지어는 저 멀리 한양까지 이동해버리는 것이다. 인간의 속도를 넘어 기계의 속도로 먼 거리를 단시간에 이동할 수 있게 된 순간, 여행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지구 반대편 미지의 세계는 전설이 아니라 동시대 인간의 눈과 귀, 입을 통해 생중계된다. 기차를 타면 누구나 저 밖의 세계를 탐험할 수 있다. 여행의 시대에는 누구나 세계 밖을 향해 달리는 꿈을 꾼다.

여행의 속도는 기차의 속도와 함께 더욱 빨라졌다. 지금은 5박6일만에도 유럽 3개국을 여행한다. 여행은 일상의 속도보다 더욱 숨가빠지고 짧은 시간에 더 많은 나라, 더 많은 도시를 여행하는 정복의 과정이 된다. 그것도 기차가 정차하는 도시들만 순서대로 정복할 수 있다. 여행 스케줄은 기차 스케줄에 따라 짜인다. 기차가 달리는 리듬에 맞춰 기차처럼 여행의 임무를 완수해나간다. 기차 안에서 창밖으로 바라보는 세계는 기차의 속도와 함께 순식간에 지나가버린다. 그럼 우리가 여행한 미지의 세계는 어디일까. 기차여행을 통해 여행을 한 곳은 놀랍게도, 단지 기차 안이다.

3년 전 나는 동아프리카의 탄자니아에서 박물관에서나 보았던 증기기관차를 탔다. 동부 해안의 다르에스살람에서 서부 국경지역의 키고마까지 2박3일 동안 소처럼 느릿느릿 움직이는 기차였다. 20분쯤 달리다가 2시간을 정차하고, 다시 20분쯤 달리다가 또 2시간을 정차했다. 창밖에서 날아오는 숯검정이 땀과 함께 얼굴과 옷에 덕지덕지 달라붙었다. 책을 읽거나 간식을 먹는 여유는 엄두도 낼 수 없었으므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움직이는 창밖을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증기기관차의 속도가 하염없이 느린 만큼 창밖의 풍경도 하염없이 천천히 지나갔다. 그 순간 나는 무언가 발견했다. 그것은 '풍경'이었다. 기차의 속도가 느려지면 우리는 비로소 기차 안이 아니라 기차 밖을 볼 수 있다!

나는 이제 세계를 탐험하는 걸까. 기차여행의 비밀은 기차를 탄 우리에게 절대 세계를 만나게 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창밖의 세계는 기차의 창문이라는 사각의 액자 속에만 갇혀 있다. 풍경은 바라볼 수만 있고 만날 수는 없는, 끊임없이 내가 가고 있는 반대 방향으로만 물러나버리는 세계이다. 기차는 나와 세계를 갈라놓는다. 기차를 타는 순간 우리는 만질 수도, 그 속으로 들어가볼 수도 없는 세계를 단지 바라볼 뿐이며, 그마저도 질주하는 기차의 속도에 날아가 버린다. 여행의 시대는 시작되자마자 끝난다.

미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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