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부] 스위스 은행

입력 2010-03-03 10:54:22

은행업은 스위스 경제의 주춧돌이다.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2%나 되며 각국의 해외 프라이빗뱅킹(PB) 예금의 3분의 1인 3조 달러가 스위스에 몰려 있다. 스위스 은행이 이처럼 번창하는 이유는 철저한 비밀주의 덕분이다. 고객의 이름 없이 숫자와 문자가 조합된 계좌번호로만 비밀계좌를 관리한다. 입출금 등 모든 거래에 이 계좌번호만 사용하기 때문에 은행원이 전표를 분실했을 경우에도 예금주가 노출되는 일이 없다. 고객 비밀 누설 시 처벌도 강력하다. 스위스연방은행법 47조에 따라 최고 6개월의 금고형 또는 5만 스위스프랑(약 6천700만 원)의 벌금형에 처해진다. 독재자나 천부(賤富)들의 온갖 '더러운 돈'이 스위스로 몰리는 이유다.

그래서 1985년 7월 전 세계가 감동한 대륙 간 자선콘서트 'Live Aid'를 기획했고 이후 빈곤 퇴치 운동가로 활동하고 있는 아일랜드 출신 가수 밥 겔도프는 2007년 "스위스 은행들은 오랫동안 더러운 돈에 은신처를 제공해 왔고 아프리카의 부정한 돈 수천억 달러의 대부분이 스위스와 런던에 있다. 스위스는 이제 더러운 돈을 아프리카에 돌려주라"고 촉구하기도 했다.

스위스의 금융 비밀주의 역사는 400여 년이나 된다. 1685년 프랑스 왕 루이 14세가 신교도의 종교 자유를 보장하는 '낭트 칙령'을 폐지하자 위그노(프랑스 신교도)들이 종교 박해를 피해 스위스로 건너와 은행업을 시작했다. 그들의 최대 고객은 역설적이게도 자신들을 박해한 루이 14세였다. 국경 확장을 위해 큰 돈이 필요했던 그는 자신이 쫓아낸 위그노에게 돈을 빌린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꺼려했다. 이렇게 탄생한 비밀주의는 1934년에 법적 지위를 갖게 된다. 독일 유태인들이 나치의 재산 몰수를 피해 스위스 은행에 돈을 예치하자 스위스 정부가 비밀주의를 아예 법제화한 것이다. 나치의 유태인 재산 색출을 막는다는 명분이었지만 유태인 예금 유치라는 장삿속이 더 컸다. 가증스럽게도 스위스 은행은 유태인 재산을 빼앗은 나치도 고객으로 뒀다.

이르면 내년부터 정부가 탈세 혐의가 있는 개인이나 기업의 스위스 은행 비밀계좌 정보를 확보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고 한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각국이 스위스에 가하고 있는 비밀주의 해체 압력이 거두고 있는 긍정적 현상의 한 단면이다. 이제 우리나라 천부들의 더러운 돈도 햇빛을 볼 날이 머지않은 것 같다.

정경훈 논설위원 jghun316@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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