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책략가의 여행

입력 2010-03-03 07:02:07

기독교 해적에 나포된 무슬림…낯선 문화, 정체성 위기속 삶

#책략가의 여행/내털리 제이먼 데이비스 지음/곽차섭 옮김/푸른역사 펴냄

주인공 알하산 알와잔은 1486년에서 1488년 사이 그라나다에서 태어났다. 얼마 뒤 스페인에서는 기독교도의 이슬람교도에 대한 재정복 운동이 일어난다.(지중해 일대를 두고 기독교 세력과 이슬람 세력은 오랫동안 다투어왔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 멸망 이후의 지중해 세계'는 이 시기의 지중해를 흥미롭게 다루고 있다)

알하산 알와잔 가족은 그라나다가 함락되기 직전 지중해를 건너 모로코의 파스로 이주한다. 그는 그곳에서 수사학, 이슬람법, 아랍시를 배우고 외교관이 되어 마그레브, 카이로, 이스탄불 등을 왕래한다. 그러나 1518년 카이로에서 파스로 돌아가는 길에 에스파냐의 기독교 해적에게 나포돼 교황(레오 10세)에게 바쳐져 로마 산탄젤로 성에 수감된다.

이때부터 알와잔은 약 10년 동안 이전과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살면서 단절과 고립, 정체성의 위기를 경험한다. 급기야 1520년에는 성베드로 성당에서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된다.(당시 무슬림은 기독교인을 무참히 살해했고, 기독교인 역시 무슬림을 잔혹하게 대했다. 그러나 각 종교는 필요에 따라 개종 시킨 다음 써먹기도 했다)

무슬림으로 태어나 살아온 알와잔은 아프리카와 유럽, 이슬람과 기독교 세계를 오가며 낯선 문화와 충돌한다. 살아남기 위해 그는 때로는 침묵하고, 때로는 집안에 틀어박히고, 때로는 반성하거나 외면한다. 지은이는 주인공의 이런 모습을 고도의 문화적 생존전략, 즉 책략이라고 말한다.

이 책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각 지역과 각 문화권을 오간 한 무슬림의 여행기이자, 삶에 관한 이야기다. 그의 행적은 단편적으로 남아있기 때문에 지은이는 희미한 흔적을 쫓으며, 스토리를 더하고 있다.

지은이 내털리 제이먼 데이비스는 미시사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 미시사란 전통 역사학의 주류 방법론인 실증주의와 상대주의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등장한 방법이다. 실증주의는 사료 없이는 논의를 진전시키지 못하고, 상대주의는 복잡한 역사적 사건의 미로에 갇혀 헤어나지 못하는 문제를 보이기도 한다. 미시사는 이런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주변부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는다. 사금파리 같은 사료를 실마리로 역사적 추론을 시도하는 것이다. 추론은 꼭 정확하지 않을 수 있지만, 흐릿한 대상을 가시화함으로써 새로운 역사적 분석과 비전을 제공한다는 장점이 있다.

1928년 미국 디트로이트의 부유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지은이는 안락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1948년 수학자 챈들러 데이비스를 만나 결혼하면서부터 정치적 고난을 겪었다. 미국에 매카시즘 광풍이 몰아치면서 여권이 압수되었고, 챈들러가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그 자신도 반공 선서를 거부해 기소되기도 했다. 1962년 캐나다 토론토로 이주해 대학에 자리 잡았다. 지은이 역시 고립, 정체성의 혼란 등을 겪은 셈이다.

지은이가 1982년에 쓴 '마르탱 게르의 귀향'은 16세기 프랑스 랑그독에서 마르탱 게르라는 농민이 아내와 자식을 두고 집을 나간 뒤 8년 만에 돌아와 지낸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여기에 진짜 마르탱 게르가 나타나고 그가 가짜임이 밝혀진다. 지은이는 이 작품에서 진짜 마르탱 게르와 가짜 마르탱 게르(아르노) 그리고 마르탱 게르의 아내(베르트랑드)의 진실 게임과 정체성을 다룬다. 그런 점에서 '책략가의 여행'은 정체성을 둘러싼 진실게임의 심화판이라고 할 수 있겠다. 611쪽, 3만3천원.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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