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 DNA와 ♂(아들)이 많은 집안, 열 살 때 인생에 도가 튼 아이, 50년 동안 140편 남짓한 주옥 같은 영화들, 배우 박중훈과는 영겁의 인연, 대구는 피란 중 태어난 곳(1952년 1월 1일 저녁 무렵 출생), 흥행이 아쉬웠던 영화는 그리고 이번에 개봉한 도 포함시켜야 할 것 같다.'
국민배우 안성기와 1시간 30분 동안 인터뷰하면서 건져낸 기사 내용들이다. 그를 만나기 전부터 '무엇을 새로 담아낼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내내 떠나지 않았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그의 삶과 생각들이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 다섯 살 때 영화판에 뛰어들어 반백년(50년) 넘는 세월 동안 국민들에게 얼굴을 알려왔으니 굳이 말해 무엇하랴.
그럼에도 안성기는 인터뷰 내내 진지했다. 질문 하나하나에 친절과 배려심이 묻어났다. 이런 농담도 오갔다. 기자가 "이름이 성기인데 놀림을 많이 받지 않았느냐"고 묻자, "이름은 이래도 성(姓)이 왕씨나 소씨, 홍씨, 황씨, 피씨 등 크기나 색깔을 연상시키지 않으니 얼마나 다행이냐"고 받아쳐 큰 웃음을 선사했다.
영화판에서 50년 넘게 굴러먹었지만(살았다는 의미를 좀 더 강하게 표현) 말 그대로 겸손 그 자체인 배우 안성기를 23일 서울 상암동 DMC센터 인근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에서 만났다. 안성기는 기자가 오기 전에 도착해 기다리고 있었으며, 사진을 찍기 좋은 곳까지 미리 봐 두고 있었다.
◆다섯 살 때부터 영화판에 뛰어든 도인(道人), 안성기
댓바람으로 역설적인 질문을 던졌다. "너무 성실하고 똑바른 이미지가 답답하지 않나요? 재미없잖아요." 이런 답이 돌아왔다. "전 어릴 때부터 애어른이었거든요. 지금은 더하죠. 거의 도 닦는 사람에 가깝죠. 어떻게 바꿀까요?" 실제 그랬다. 안성기는 좀체 마음의 흔들림도 없을 뿐더러 누군가를 향해 화를 내지 않았다.
10대 때 이미 평정심을 유지하는 법을 깨달았다. 그의 마음 다스림 비법은 이렇다. '모든 게 나로부터 시작되며, 다 내 탓으로 귀결된다. 누굴 탓하랴.' 일찌감치 이를 깨달은 데다 한 가지가 덧붙여졌다. '타인의 단점을 드러내거나, 내가 감정이 흐트러질 때는 굳이 표현하지 말고 좋은 일이나 슬픔은 항상 같이 하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마침 원로 코미디언 배삼룡씨의 타계 소식이 문자로 날아왔다. "서울아산병원에 가봐야겠군." 그랬다. 그는 동료, 선·후배들의 대소사를 가장 잘 챙기는 배우로 정평이 나 있다.
술이나 담배, 유흥(이성) 쪽에는 왜 관심이 없냐고 묻자, "술은 요즘 조금씩 마시고 있으며, 담배는 끊었고, 유흥 쪽은 잘 맞지 않아 가까이 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이어 그는 "제가 그런 쪽을 즐기고 친숙하면 모르겠지만, 맞지 않는데 억지로 그럴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라고 되물었다.
하지만 일탈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었다. 아주 어린 시절(15세 이전) 화투(고스톱)나 당구(내기) 등 잡기를 시작해 재미를 느꼈는데, 그것보다 더 가치 있고 보람된 일인 영화 쪽에 매진하고 있을 뿐이라고 했다.
◆140편 영화 이야기, 1년에 2편 꼴
안성기가 주·조연으로 출연한 굵직한 작품으로 짧은 글을 엮어봤다.
주옥같이 스쳐지나간 그의 영화 인생 스토리다. 안성기는 이 영화들 중 초기 데뷔작 '황혼열차'와 제작 당시 획기적인 영화로 평가받으며 그를 유명하게 만들어준 '바람 불어 좋은 날'에 큰 의미를 뒀다. 특히 '바람 불어 좋은 날'에 대해서는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거하고 전두환 군사정부가 들어설 무렵 다소 어수선해 검열을 통과할 수 있었고, 개봉되자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던졌다"고 털어놨다.
흥행에 크게 성공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그에 미치지 못한 영화를 꼽으라고 하자, 1995년 '영원한 제국'과 2001년 '무사'를 떠올렸다. 그는 "'무사'는 당시 중국 액션에도 큰 영향을 미칠 정도로 호평을 받았으나 미국 9·11테러로 영화를 볼 분위기가 아니었으며, '영원한 제국'은 제가 맡은 정조역을 현대식으로 재해석하며 열연했으나 재미면에서 관객들에게 어필하지 못한 것 같다"고 안타까워했다.
◆안성기의 잡동사니, 이러쿵 저러쿵
-건강 관리 비법은.
▶전 귀에 불순물이 들어가거나 비염, 감기 등 누구나 조금씩 아픈 것 말고 크게 아파본 적이 없습니다. 집안도 장수 유전자를 지녀 지난해 어머니가 하늘나라로 가셨으며, 아버지는 팔순을 훌쩍 넘었는데도 아직 건강하십니다. 웨이트 트레이닝 등 자기 관리는 항상 하죠.
-집안에 딸이 귀하다던데.
▶제가 아들 셋 중 둘째인데 3형제 중 큰형 집안에만 유일하게 딸 하나가 있습니다. 나머지는 전부 아들입니다. 물론 저도 아들 둘이고요.
-부부싸움은 하는 지.
▶남들처럼 가끔 하지요. 그렇지만 세게(던지거나 윽박지름 등) 하지 않고 대부분 말다툼으로 끝내고 하루를 넘기지 않아요.
-송강호·설경구·김윤식 등 뛰어난 후배 배우에 대해.
▶저를 뛰어넘는 훌륭한 배우들이라 생각합니다. 전 50년 세월을 영화판에서 살며 이 역할, 저 역할을 소화하며 연기력을 다져왔는데 요즘 배우들은 자기 세계가 뚜렷할 뿐만 아니라 임팩트있는 연기도 돋보입니다.
-한국 영화 이랬으면 하는 바람은.
▶경인년 첫 소망은 굿 다운로더(Good downloader, 불법 다운로드는 근절하자) 캠페인의 활성화, 두 번째 소망은 1980년대와 1990년대에 활동했던 중견 감독들의 재기, 세 번째 소망은 우리 영화가 좀 더 획기적이고 다채로워졌으면 하는 것입니다.
-5년 전까지만 해도 매니저가 없었다는데.
▶예. 저 혼자 운전하는 걸 즐겼어요. 나만의 공간에서 운전하며 음악 듣고 사색하는 게 그렇게 좋더라고요. 지금은 매니저가 있어야 일이 효율적으로 진행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압니다. 현 매니저는 대구 출신 박상우(30)씨인데 호흡을 잘 맞추고 있습니다.
-4개국어를 한다는데.
▶아닙니다. 지금은 다 잊어버려서 잘 못해요. 베트남에 진출하기 위해 대학을 베트남어학과로 가다 보니 조금 기억나고요. 중국어도 무사 촬영 당시 실전용으로 조금 익혔으며, 영어는 남들처럼 조금 하지요. 그것도 4개국어랄 수 있나요? 베트남어 한번 할까요. 모이응아이 야바오 돗!(매일신문 최고!)
-이번 영화 '페어러브'가 흥행이 안 될 것 같아 속이 탄다는데.
▶그렇지는 않고요. 친구의 딸을 보살피다 사랑이 싹트는 순수 총각의 열정을 자연스레 잘 담아내려 노력한 좋은 영화입니다. 개봉관 수가 작아 조금 속상하기는 해요.
-아들 안다빈(22)이 영화배우가 된다면.
▶좋죠. 적극 밀어줘야죠.
-향후 계획은.
▶절 필요로 하고 제 연기를 원하는 관객이 있는 한 계속 현역입니다.
권성훈기자 cdrom@msnet.co.kr
사진·프리랜서 장기훈 zkhaniel@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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