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쁜 일상에 쫓겨 사는 현대인들에게 '슬로라이프'(slow life, 느리게 사는 삶)는 욕망이자 이상이다. 무한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1분의 시간도 쪼개 써야 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호흡을 가다듬을 수 있는 여유(슬로라이프)를 꿈꾸지만 현실은 이를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하지만 웰빙 열풍을 타고 그 이상을 현실로 만드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슬로라이프도 확산되고 있다.
◆슬로다이어트
무리한 다이어트는 오히려 건강을 해칠 수 있다. 단순히 굶거나 특정 음식만으로 살을 뺄 경우 영양 불균형, 식습관 장애 등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애써 줄인 체중도 요요현상으로 물거품이 될 수 있다. 단기간에 많은 체중을 빼는 다이어트가 여러 가지 부작용을 불러일으킴에 따라 등장한 것이 슬로다이어트다. 슬로다이어트의 핵심은 균형 잡힌 식단과 운동을 통해 서서히 체중을 감량하는 것.
목표 체중을 무리하게 잡지 않고 목표 체중에 도달하는 기간도 정해 놓지 않는다. 하루 1천600㎉의 식단과 규칙적인 운동을 꾸준히 할 뿐이다. 또 생활 속에서 운동량을 늘리는 행동 교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기초대사량도 증가시킨다. 기초대사량이 늘어나야 살이 찌지 않기 때문이다.
다이어트에 필수적인 유산소 운동의 속도도 느리다. 빠르게 뛰는 것보다 바른 자세로 걷는 것이 슬로다이어트 운동의 특징이다. 올바른 자세로 걷는 것은 관절에 무리를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뛰는 것만큼 효과적으로 칼로리를 소모시킬 수 있다고 한다.
◆슬로육아
'느리지만 소신있게.' 슬로육아족들이 표방하는 슬로건이다. 슬로육아는 조기교육 열풍으로 일찌감치 공부로 내몰리고 있는 아이들에게 놀 권리를 찾아주려는 부모들을 중심으로 입지를 넓혀가고 있다. 선행학습을 포기하고 평생학습을 지향하는 슬로육아를 펼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부모의 확고한 육아철학이 필요하다. 다른 아이들보다 뒤처지지 않을까 조바심을 내는 것은 금물이다.
텔레토비식 슬로육아의 핵심은 아이 눈높이에 맞춘 교육과 느리지만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제대로 전달하는 방법을 스스로 깨우치게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천천히 말하고 행동하며 쉬운 것을 반복해서 말해 주는 부모의 실천이 필요하다. 또 시각적인 자극으로 아이의 호기심을 키우고 실수와 체험학습을 통해 새로운 사실을 배워나가도록 배려해야 한다.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이자 세브란스병원 소아정신과 전문의인 신의진 교수는 '느림보 학습법' '현명한 부모들은 아이를 느리게 키운다' 등의 책을 펴낼 만큼 느림보 교육 예찬론자다. 신 교수는 조기교육이 우리 아이들의 몸과 마음을 병들게 한다고 말한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아이들에게 성장 발달과 아무 관계가 없는 교육을 시키면 스트레스를 줘 오히려 성장을 방해한다는 것. 신 교수는 "영'유아기에는 그릇에 무엇을 담느냐보다 얼마나 튼튼하고 질 좋은 그릇을 만드느냐가 더 중요한 시기다. 아이의 적성과 개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마구잡이식으로 이것저것 넣어주는 것보다 아이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빠르게 파악해 자유롭게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게 해주면 아이의 그릇은 탄탄해져 자연스럽게 많은 정보를 담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슬로푸드
패스트푸드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등장한 용어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자연의 순리에 따라 재배된 먹을거리를 말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즐겨 먹는 음식의 대부분은 슬로푸드다. 특히 김치, 두부 등은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슬로푸드다. 슬로푸드는 다이어트에도 효과적이다. 대부분의 슬로푸드가 섬유질을 많이 함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방 함유율이 낮기 때문이다.
'슬로푸드' 개념을 낳은 슬로푸드 운동은 1980년대 중반 이탈리아에서 시작됐다. 로마의 명소 에스파냐 광장에 맥도날드가 문을 열자 패스트푸드가 이탈리아의 식생활을 망친다는 위기 의식을 불러왔고 이것이 슬로푸드운동으로 이어졌다. 전통음식보존 등의 기치를 내걸고 시작된 슬로푸드 운동은 현재 100여개국 8만여명의 회원이 활동하는 세계적 규모의 시민운동으로 성장했다. 오늘날 슬로푸드 운동은 패스트푸드를 반대하는 개념을 넘어 환경과 공정거래를 추구하는 소비자운동으로 발전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슬로푸드 운동을 벌이는 대표적인 단체는 슬로푸드문화원이다. 경기도 남양주시에 위치한 슬로푸드문화원은 슬로푸드 기행, 슬로푸드 요리체험 등 다양한 강좌와 한국'세계의 슬로푸드'로컬푸드 등을 전시한 체험관 등을 마련해 두고 있다. 또 지난해 말 국내외 전문가들이 참석한 가운데 '2009 슬로푸드 콘퍼런스'도 개최했다. 안종운 슬로푸드문화원 이사장은 "국내 슬로푸드 운동은 시작 단계"라며 "전국적인 협조 체계를 구축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슬로시티
느려서 아름답고 불편해서 즐거운 곳이다. 슬로시티는 '유유자적한 도시' 또는 '풍요로운 마을'을 의미하는 이탈리어어 '시타슬로'의 영어식 표현으로 느림의 철학을 바탕으로 지속가능한 발전을 추구하는 커뮤니티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세계슬로시티연맹이 지정한 5곳(신안군 증도면, 완도군 청산도, 장흥군 유치'장평면, 담양군 창평면, 하동군 악양면)의 슬로시티가 있다.
신안군 증도면에는 우리나라 최대의 염전이 있다. 슬로시티 지정을 위해 실사를 나온 세계슬로시티연맹 관계자들은 하얀 마분지 위에 바둑판처럼 선을 그은 것 같은 염전을 보고 "신이 내린 축복"이라고 감탄했다. 소금의 고장답게 국내 유일의 소금박물관도 있다. 소금의 역사와 가치 등을 살펴볼 수 있는 공간으로 소금창고를 개조해 만들었다고 한다. 소금박물관 건물은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만큼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증도면의 또다른 명물은 장뚱어다리다. 드넓은 갯벌을 가로지르는 470m의 다리로 썰물 때 뻘 위에서 펄쩍 뛰는 수많은 짱뚱어를 볼 수 있어 장뚱어다리라는 독특한 이름을 갖게 됐다.
영화 '서편제' 촬영지로 유명한 완도군 청산도는 세계슬로시티연맹 관계자들로부터 "완벽한 슬로시티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극찬을 들을 만큼 뛰어난 풍광을 자랑한다. 푸른 바다를 향해 나지막이 고개숙인 지붕들, 밭과 집 사이 대충 얹어 쌓은 듯한 돌담길, 그리고 주민들이 쓰는 구수한 사투리가 어우러져 동화속 풍경을 연출한다.
장흥군 유치'장흥면은 유기농법과 순환농법을 하는 농가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인분 냄새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볏짚들이 옛날 농촌마을을 연상시킨다.
담양군 창평면은 현대와 전통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곳이다. 특히 삼지천마을의 고택과 돌담길에서의 여유로운 산책은 슬로라이프를 체험하기에 제격이다. 마을을 따라 3㎞ 정도 이어진 돌담길을 따라 걷다 보면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느낌이다. 담양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먹을거리다. 창평국밥, 국수, 떡갈비, 한과 등 다양한 전통음식이 슬로시티 여행을 더욱 풍요롭게 만든다.
하동군 악양면에는 차향과 문향이 넘친다. 산기슭 야생 차밭은 1천300년 넘게 하동을 지키고 있으며 평사리 최참판댁은 소설 '토지'에 나오는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차 재배지로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슬로시티로 지정됐으며 하동의 녹차는 지난해 세계슬로시티연맹 공식지정 특산품이 됐다.
이경달기자 sara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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