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부] 訓練場

입력 2010-02-24 10:48:03

1차 대전 때 독일군의 막강 전력에 혼쭐이 난 연합국은 베르사유 조약을 통해 독일을 군사적 절름발이로 만들었다. 독일군의 규모는 장교 4천 명을 포함해 10만 명을 넘을 수 없도록 묶였고 육군은 어떠한 전차도 개발'보유할 수 없었으며 공군은 존재 자체가 없어졌다. 해군도 마찬가지였다. 해군 전력은 총 배수량 10만t 이하로 제한됐고 엄청난 전과를 올린 유보트는 아예 보유가 금지됐다. 이 때문에 독일은 신무기나 새로운 전술의 시험은 물론 체계적인 훈련도 불가능했다.

독일은 이 같은 제약을 1922년에 체결된 소련과의 군사협력협정으로 돌파했다. 당시 독일은 '전범국'(戰犯國)이라는 이유로, 소련은 공산주의 때문에 유럽에서 불가촉 천민 취급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동병상련의 처지가 양국을 군사적 통정(通情)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이를 통해 소련은 독일의 군사 기술을 지원받을 수 있었고 독일은 연합국의 감시를 피할 수 있는 비밀 훈련장을 얻었다. 독일은 모스크바 동남쪽 온천도시 리페츠크에 비행장을 건설해 조종사 훈련과 신형 비행기 성능 시험을 했다. 볼가강의 카마에는 탱크 학교를 세워 기갑부대를 이용한 기동전 전술을 갈고 닦았다. 오늘날의 볼스크인 톰카에는 화학전 단지를 만들어 가스 공격과 방호 시험을 했다. 이러한 비밀 훈련을 통해 독일은 2차 대전에서 연합국을 경악시킨 전격전 전술을 완성할 수 있었고 모델, 브라우히치, 만슈타인, 구데리안 등 숱한 명장들을 길러냈다.

우리 군이 훈련장 부족으로 애를 먹고 있다고 한다. 육군 훈련장은 3천600여 개에 이르지만 대부분 규모가 작아 중대급 이하의 보병부대 훈련만 가능하다. 보병, 포병, 전차 등 육군 전투병과가 한꺼번에 공군과 합동 훈련을 할 수 있는 '제병협동 및 합동훈련장'은 경기 포천시의 승진훈련장 한 곳뿐이다. 이 때문에 대대급 이상이 1주일간 실시하는 공지합동훈련을 받을 수 있는 기회는 육군 1개 대대당 4년 반에 한 번밖에 안 된다고 한다. 또 수원 공군기지와 대구기지는 가장 중요한 훈련인 야간 이착륙과 저공비행 연습을 거의 하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도 있다.

모두 훈련장 건설에 대한 주민들의 반대나 소음 공해 민원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 군의 처지가 남의 땅에서나마 마음껏 훈련할 수 있었던 1920년대 독일군보다도 못한 것 같아 안타깝다.

정경훈 논설위원 jghun316@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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