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시조 들여다보기] 눈 맞아 휘어진 대를

입력 2010-02-20 07:22:21

눈 맞아 휘어진 대를

원천석

눈 맞아 휘어진 대를 뉘라서 굽다턴고

굽을 절(節)이면 눈 속에 푸를소냐

아마도 세한고절은 너 뿐인가 하노라.

"눈을 맞아서 그 무게 때문에 휘어진 대나무를 그 누가 굽었다고 하던고 / 굽힐 그런 절개라면 찬 눈 속에서도 저렇게 푸를 수가 있으랴? 생각건대 엄동설한에도 추위를 이겨내는 굳센 절개는 오직 대나무 너 뿐인가 하노라"로 풀리는 시조다.

자세한 연대가 밝혀지지 않은 고려 말의 학자 원천석(元天錫 1330~?) 작이다. 그의 호는 운곡(雲谷).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원주 치악산에 숨어 살았다. 은거하면서 당시 사적을 바로 적은 야사(野史) 6권을 저술하였으나 국사와 저촉됨이 많아 증손 대에 이르러 화를 미칠까 두려워 불태웠다고 한다. 주요 작품으로 '원곡시집', '회고가' 등 2수의 시조가 전한다. 태종의 어릴 적 스승이었으므로, 그가 왕위에 오르자 여러 번 간곡히 불렀으나 끝내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작품과 작가의 이력을 살펴보면 이 시조의 의미가 더욱 깊어진다. 고려 왕조가 망하자 그를 슬프게 여겨 은거한 사람이 그가 가르치던 이방원이 왕이 되었다고 해서 권력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 옳지 않다는 판단을 하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긴 사람이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법, 어찌 고려의 신하가 조선 왕조에 절개를 굽힐 수 있겠는가. 그러니까 이 작품은 권력에 굽히지 않는 지사의 굳은 마음을 표현한 것인데 자신의 뜻을 노래한 것임이 분명해진다.

이 작품은 말을 줄여 쓴 것이 돋보이는데 초장의 '굽다턴고'는 '굽었다고 하던고?' 를 줄인 것이고 '푸를소냐'는 '푸를 수가 있으랴?' 라는 의미다. 하고 싶은 말을 직설적으로 다 뱉는 것이 아니라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게 줄여서 시의 가락을 살려낸 것을 보면 그의 정신 못지않게 시적 재능도 뛰어난 것으로 보인다.

조그만 이익을 위해서 말을 바꾸고 행동을 바꾸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현대에 명분을 지키는 일이 얼마나 중요하고 또 아름다운 일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몇 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 원천석이 회자될 수 있는 것은 권력 앞에서도 대나무처럼 푸르게 지조를 지켰기 때문이리라. 아! 나는 지켜야 할 지조를 지키고 사는가? 돌아보아야겠다.

문무학·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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